(502) 내가 아는 이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제26화>|곽상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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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박사와 야당> ④
이박사가 야당을 어떻게 보고 다뤄왔는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이박사는 건국초기 정당의 존재를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듯한 말을 자주 했다. 그 무렵만 해도 한민당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정치단체가 이박사의 협조자였다.
야당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돼가면서도 그 구성원을 한사람씩 떼놓고 보면 언제든 이박사를 기꺼이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무렵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독립운동이라는 유대로 묶여졌던 사람들이었듯이 야당의 지도자들도 개인적으로 모두 이박사와는 가까운 사이였다.
건국후 경무대와 인촌 김성수씨의 사랑방인 계동이 정치의 큰흐름을 이루는 두개의 「센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계동의 주인 인촌도 이박사와는 오랜 연고가 있는 후배이자 협조자였다.
『내가 「하와이에 있을 적부터 고 김성수군과 벌써 고인이 된 송진우·장덕수제씨와의 친분이 생겨 교통이 막힌 중에서라도 이들을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박사가 인촌 서거후 그를 추도하며 한말처럼 일제치하에서 해외의 이박사와 국내의 인촌은 조국광복을 위해 서로 연락을 취했었다.
인촌 등이 중심이 된 한민당은 미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유력한 정당으로 환국한 이박사의 정치활동에 주축역을 맡아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이 한민당은 45년 9월 여운형씨 등의 정당조직에 대응해서 창당을 서두르면서도 당수자리는 이박사를 위해 비워두었었다.
이박사는 환국후 어느 특정 정당에 얽매이는 것이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에 이롭지 못하다해서 당수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한민당은 이박사를 지주로 해서 정치구도를 그렸었다.
이박사가 정당 사회단체를 묶어 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했을 때 이박사가 회장, 인촌이 부회장을 맡았다.
제헌당시 한민당은 내각책임제가 당책에 있고 당내 다수 인사들이 끝까지 내각책임제를 관철하자고 했으나 완강한 이박사의 뜻에 굽혀 대통령 책임제에 따르도록 단을 내린 것도 인촌이었다.
한민당 사람들도 그랬지만 그 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대 국무총리는 인촌이 맡게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이화장으로 인촌을 불러들인 이박사는 국무총리 아닌 재무를 내놓고 인촌에 권했다. 이박사의 말은 국무총리란 대통령을 보좌할 뿐 실권이나 실질적으로 맡아 해야할 일이 없으니 재무를 맏아 일을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인촌은 이박사의 부름을 받았을때 국무총리를 맡게 하고 조각에 대한 전반적인 협의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가 아주 실망했다는 얘기였다. 어떻든 조각의 결과는 한민당에 대한 견제의 인상을 풍겼고 인촌은 야에 머무르게 됐다.
6· 25후 부산 피란정부에서 이시영 부통령은 이박사에 대한 직언이 전연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를『시위에 앉아 소찬을 먹는 격』이라면서 사퇴했다. 51년 5월 16일 국회는 그 후임에 인촌을 선출했다.
그러나 부통령자리는 인촌에게도 매우 괴로운 자리였다. 전란속의 정부에서조차 부패가 만연해 민심은 정부를 등져갔다.
부통령인 인촌은 이박사에게 시국에 대한 건의를 해보려했으나 되는 일이 없었다.
이박사는 부통령이란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을 대리하고 평상시에 대통령이 어떤 일을 맡기지 않으면 할 일이 없는 자리로 알고 있었다.
자연 인촌은 의회내 야당세력을 끌고 대통령에 대항하는 부통령이 됐다.
이러다 정치파동이 요동치던 52년 5월 29일 인촌은 야당의원 탄압을 위한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부통령직을 사퇴하고 이박사와 완전히 결별했다.
인촌은 국회에 부통령직 사퇴서를 보내면서 사퇴이유를 밝히는 장문의 성명서를 통해 이박사 영도하의 정부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현정부의 수반인 이박사는 충언과 직언을 염오하며 그의 인사정책은 사적 친분으로 일관된 중에도 자기의 각료조차 항상 시의의 눈으로 보아 모든 국사를 그 자신이 일일이 즉결하려 하고 자신이 임명한 장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른 심복인을 차관에 배치하고 그 차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른 심복인을 국장에 임명하는 것과 같은 수단으로 그의 밑에서는 아무도 가진바 역량과 포부를 발휘할 수 없다. … 이와 같이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이미 고육에 사무쳤으며 그것은 나의 전임자이신 성재 이시영 선생의 고덕과 지성으로써도 만회할 길이 없었다.…천하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성모(전국방장관)는 가장 비민주적인 권모와 술수로써 국정을 혼탁하게 하여 온 장본인으로서 서울 철수시에는 애국시민을 적의 호구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강을 건너려는 자를 총검으로 방해하였으며 군용금을 횡령하여 사적 정치자금으로 이용하는 등 그가 국가민족에 끼친 해독은 실로 죄당만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를 징벌을 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외교의 요직 (주일대사) 에 등용하여 국가를 대표하게 한다는 것은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하여서 나 정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하여서나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어 성명은 의원의 구속등 정치파동을『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쿠데타」』 라고 규정짓고 『지금이 어떠한 시기이길래, 국가의 비운과 민생의 고난을 외면하고 이다지도 난맥의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이박사에 대한 정면공격을 하고 나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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