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이슈] 요즘 직장인 고시생 뺨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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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청년 실업'. 아예 취직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 이 단어가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됐다. 그만큼 취업 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어렵사리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숨을 돌릴 새 없이 또 다른 '서바이벌 게임'들이 기다리고 있다. 승진 또는 고과를 위해 치러야 하는 각종 사내 시험들이 바로 그것이다.

◆공부해야 살아 남는다=정보기술(IT)기업인 YMB시사닷컴의 직원들은 지난해 말 회사로부터 전산자격증의 일종인'MOS(Microsoft Office Specialist)'의 취득 여부를 올해 연봉에 반영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지침이 내려지자 이 회사 게임사업부의 경우 팀원들이 단체로 교재를 사고 스터디 모임도 만들었다.

업무시간을 피해 공부는 주로 새벽에 출근해서 한다.

전략 디자인팀의 이병호(28)씨는 MOS 자격증 취득을 위해 아예 데이트 스케줄까지 바꿨다.

李씨는 "주말에 데이트를 하면 영화나 연극을 보러 다녔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PC방으로 직행해 오피스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여자 친구에게 실기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사 오재환 이사는 "자격증 취득 방침을 통보했을 때 직원들이 부담을 느낀 것은 사실"이라며 "인사 고과 등에 자격증 취득을 반영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한글 인터넷주소 서비스업체인 넷피아는 3개월간의 신입 사원 수습기간이 끝나면 필기 시험과 설명회(프리젠테이션)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출제 내용은 회사 업무와 관련된 실무지식이다.

이 회사 이성룡 홍보팀장은 "철저한 보안 아래 시험이 치르기 때문에 시험장이 대학 수능 시험교실 같다"며 "이것 외에도 수시로 전사원을 상대로 최신 업무 정보나 지식을 물어보는 프리젠테이션이 있다"고 전했다.

일정 수준의 전문 지식이 필요한 증권사도 시험을 자주 보는 업종 가운데 하나다.

현대증권의 경우 입사 후 대리로 진급하기 전까지 모든 평사원은 해마다 두차례 선물 옵션.증권거래법 등 실무와 관련된 내용의 시험을 봐야 한다.

A증권사의 한 직원은 "우리 회사도 비슷한 시험을 치르지만 요즘처럼 시황이 안좋은 때는 사내 시험을 감원의 명분으로 쓰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돈다"고 전했다.

한솔제지의 경우 책을 많이 읽는 직원을 승진 때 우대하는 독특한 인사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일명 '자율독서제'다. 직원들은 마케팅이나 회계에 관련된 핵심 역량 자율도서와 직무와 관련된 직무역량 자율 도서 가운데 선택해서 읽을 수 있다.

이 회사 홍보팀 관계자는 "직원들이 1년 동안 적어도 10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내야 한다"며 "우수 독후감은 사례집도 내고 사내 전산망을 통해 알리고 있다"고 했다.

◆어학은 영원한 숙제=광고기획사인 제일기획은 오는 7월까지 전임직원이 예외없이 어학 자격을 따라는 '특명'을 내렸다.

제일기획은 대리 진급 때엔 삼성그룹의 어학검증시험인 SST(Samsung Speaking Test)의 관문을 통과하도록 못박고 있다. 물론 차장과 국장.수석 진급 때에도 SST를 기본 심사항목으로 넣어 가감점을 주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영어에 워낙 신경을 쓰다 보니 회사에서 운용하는 3개월짜리 어학연수원에 들어가는 것도 경쟁이 치열하다"며 "어학 실력이 떨어지면 진급은 물론 해외 근무 등에서도 손해를 보기 때문에 퇴근 후에도 영어에 매달린다"고 전했다.

LG그룹도 임원이 되기 위해선 자체적으로 마련한 영어 테스트 관문을 통과하도록 하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토익 등 기존의 필기형 영어시험으로는 어학능력을 검증하기 힘들 뿐더러 그룹의 비즈니스가 갈수록 국제화하고 있어 회화능력 평가를 강화한 시험을 따로 치르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시험이 까다로운 만큼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LG 계열사의 상무급 임원은 "외국인과 30분 이상 일대일로 대화하고 토론이나 의견 제시까지 해야하는 등 수준이 높아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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