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하늘의 전쟁(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제10전투 비행 전대>(1)
1951년10월11일부터 53년7월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한국 공군의 출격 작전은 거의 강릉 기지에서 감행되었다. 10월l일에 사천에 본부를 둔 제1전투 비행단의 강릉 전진 기지로 발족한 제10전투 비행 전대는, 급속히 증강되어 53년2월15일에는 F-51기 40여대를 기간으로 한 전투 비행단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51년10월11일부터 F-51전투기 20여대로 한국 공군의 독자 출격 작전이 시작된 후부터는 강릉 비행장에는 젊은 조종사와 정비사들의 투지와 열기가 불을 뿜었다.
북한에 대한 전술 폭격과 공지 협동 작전 등에 연일 출격하여 휴전까지 제10전투 비행 전대에서는 도합 39명의 l백 회 출격 기록 조종사를 배출하였다. 1백회 출격 조종사들은 모두 사천 기지에 교관으로 부임하고 때로는 1백 회 미달 조종사들도 강릉과 사천을 번갈아 왕복하면서 출격과 후배 조종사들 교육 훈련에 임하였다. 더욱이 51년10월11일부터 개시된 독자 출격은 그 당시 전세가 다급한 탓도 있지만 전과를 올리려는 생각에서 맹렬한 출격을 계속하여 조종사들이 과로하는 바람에 일시 후방의 서남 지구 공비 토벌 작전에 돌리는 일까지 생겼다.
즉 51년11월28일에 대부분의 전투기를 강릉으로부터 사천으로 이동시켜 백선엽 사령관이 지휘하는 군경 합동의 공비 소탕 작전을 지원 출격케 하다가 12월 10일에 일단 복귀하였고 그후 다시 12월19일부터 25일까지 진해에서 공비 토벌을 지원하였다. 이 2회의 후방 지원 작전은 과로에 지친 조종사에게 휴식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12월25일부터는 제10전투 비행 전대는 다시 북한 출격을 속개하였다. 이때는 사천에서 교육받은 조종사들이 속속 강릉에 도착하여 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루 2·3회씩이나 출격>
다음은 이 무렵의 관계자들 이야기.
▲권성근씨(당시 제10전비전대 조종사=대위·예비역 소장·현 사업·47) <우리 10전투 비행 전대에서 독자 출격을 개시하고부터는 하루에도 2∼3회씩 적지에 출격하다 보니 조종사들이 지쳐서 「노이로제」에 걸리기도 했어요. 20여일 동안을 하루도 쉬지 않고 나가니까 과로와 긴장으로 그렇게 된 거지요. 밤이면 어떤 조종사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잠을 못 잤답디다. 전 대장 김신 대령의 부관으로 있을 때엔 나는 매일 조종사들의 조달하느라고 애먹었어요. f-51 전투기를 몰 수 있는 대부분의 이 지경이니 큰 일입디다.
아직 교대해 줄 조종사도 훈련이 덜 됐고, 이대로 나가다가는 모두 입원할 정도까지 이르렀어요. 51년10월11일부터 우리 제10 전대가 올린 출격 회수나 전과는 1개 비행단에 맞먹을만 했어요.
원산·신고산·곡산 등지에 출격하면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조근마한 골짜기 하나도 악착같이 뒤지며 때렸어요. 우리 공군 군의관인 계원철 대령이 와서 우선 조종사 안색만 보더니 더 출격시키면 안 된다고 잘라서 말합디다. 더 버티면 쓰러지는 길밖에는 없다는 거예요. 이 무렵에 김정열 참모 총장이 강릉 기지로 시찰하러 와서 실정을 살피더니 조종사 건강을 몹시 걱정하더군요.
김 장군은 조종사 하나 하나를 위로하면서 출격을 잠시 중지하라고 명령하고 미5공군과 합의해서 곧 조치하겠다고 했어요. 이래서 51년11월30일에 강릉 부대의 주력은 진해 기지로 내려가 서남 지구 공비 토벌을 지원하게 된 것입니다. 토벌 지원 출격은 북한 출격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거였어요. 김정열 참모총장은 이 같은 방법으로 지친 조종사들을 휴식케 해주었습니다. 51년12월25일에 우리는 다시 강릉으로 올라왔고, 52년 봄부터 사천서 훈련받은 F-51 전투기 조종사들이 계속 보충돼서 작전 수행이 좀 수월해 졌지요.>

<휴식 위해 공비 토벌 지원>
▲김정열씨(당시 공군 참모 총장=소장·예비역 중장·현 삼성물산 사장·55) <우리 조종사들이 폭격·사격 훈련을 조직적이며 대규모로 시작한 것은 1·4후퇴 후 제주도 기지에서부터였지요. 그리고 사천 기지에서는 사격술·계기 비행 등을 익혔고요. 51년9월에는 동해안에 배치된 우리 국군 제1군단의 지원을 위해 미 공군과 합의 아래 강릉에 제1 전투 비행단 전진 기지를 설치했습니다. 이 때에 조종사들은 미5 공군 검열단으로부터 엄격한 전투력 시험을 받았는데 그간 연마한 기술과 실전 경험으로 놀랄 정도의 우수한 성적을 올렸어요.
강릉에서부터 비로소 우리 조종사들로만 편대를 짜고 세부 폭격 목포도 우리가 자유로이 선정하는 독자 작전을 시작했어요. 이때 우리 조종사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쉴새없이 원산·신고산·흥남·진남포 등지에 매일 출격했습니다. 12월에는 강릉 전진 부대의 일부 조종사들을 사천으로 뽑아다가 육군의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을 공중 지원했어요. 우리 조종사들이 과로로 몹시 쇠약해졌는데 마침 육군서 토벌 작전 지원 의뢰가 있어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조종사와 마찬가지로 정비사들의 노고와 피로도 대단했어요. 강릉 기지에 시찰 갔을 때 정비사들은 풍향이 바뀔 때마다 기수를 밤을 새워 가며 세 번이나 옮겨 놓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청천강 이남에만 출격해>
▲김신씨(당시 10전 비전 대장=대령·예비역 중장·전 주중 대사·현 교통부 장관·50) <51년11월 하순에 김영환의 뒤를 이어 제10전 비전 대장으로 임명되어 강릉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우리 전투기들은 청천강 이남에만 출격하고 미 공군 「제트」기들이 한만 국경 근방까지 올라가 적「미그」와 공중전을 벌였지요. 미 제5 공군 사령관 「얼·파트리지」 중장이 직접 F-86 「세이버·제트」기를 가지고 수원에 와서 출격을 지휘하기도 했어요.
우리 공군은 차량·철도 등의 후방 보급 차단을 중심으로 대지 공격을 맡아 했어요. 이 무렵에 우리 조종사들은 출격에 지쳐 어떤 사람은 저녁에 술이나 신경 안정제를 먹지 않고 서는 잠을 이루지 못 했어요. 나는 황해도 해주로 출격했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적 대공 포화에 맞아 비행이 금지된 판문점 휴전 회담장 상공을 비틀거리며 날아 겨우 여의도 비행장에 불시착을 했어요.
내 뒤에 따르던 조종사들이 내 비행기가 적 포화에 맞는 것을 보고 먼저 돌아가 소문을 내서 내가 전사했다고들 야단이 났어요.>
김신 대령 이외에도 제10전 비전대 조종사들이 적지 출격에서 아슬아슬하게 사선을 넘은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 두드러진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이희근씨(당시 제10전 비전대 조종사=대위·현○○기지 사령관·소장·44) <52년3월 초에 중부 전선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질 때인데 나는 제4편대장으로 철의 삼각 지대 창도리로 출격 나갔어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깊숙한 계곡에 위치한 적 보급 집결소 주위엔 무수한 고사포 진지가 있읍디다.
적의 전방 보급소와 탄약 적재소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대공 포화가 마구 작렬하데요. 편대 군장 이기합 소령은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화강을 뚫고 급강하하며 폭탄을 투하하고 올라왔는데 앞에 들어간 3개 편대는 불행히도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고 돌아 나왔어요. 이 소령은 나에게 『너의 편대만이 이제 남은 공격력이니 임무를 완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수를 남으로 돌리더군요. 나는 저공으로 강하해서 투탄을 마치고 올라와 편대를 집합시키기 위해 날개를 흔들고 있었어요. 보니까 3번기 마종인 대위가 폭탄을 다 투하 못하고 왼쪽 날개 밑에 한 개가 그대로 매달려 있어요.

<엔진 피격·골공으로 탈출>
마 대위는 남은 폭탄을 투하하려고 기체를 좌우로 흔들며, 온갖 노력을 해도 떨어지지 않습디다. 이것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비행기에 요란한 진동을 느꼈어요.
고사 포탄이 명중해 「엔진」옆의 배기관에서 불이 나기 시작하데요. 편대 군장에 피격 보고를 하고 나니 「엔진」 출력이 감소되면서 잠시 후에는 아주 멎어 버렸어요.
처음엔 낙하산으로 탈출할 생각도 했지만 내려 봤자 적지이니 그럴 수도 없어요.
다행히 고도는 8천5백「피트」를 유지해서 골공하면서 가 보는데 까지 가자고 결심했어요. 기수를 낮추어 고도 손실을 없애고 계속 남으로 내려가니 양구 비행장이 15리밖에 어른거립디다.
이젠 전선을 넘어 아군 진지 내에 들어왔으니 떨어져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양 강변에 불시착할 생각으로 조종간을 꺾는데 푸른 강물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착륙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어요. 얼마 후 깨어 보니 추락할 때 비행기가 뒤집혀 내가 거꾸로 매 달려 있어요. 뒷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말이 아니고요. 얼굴은 피투성이고 입도 찢어져 검붉은 피가 콜콜 나오구요. 가까스로 무전기를 찾아 편대 군장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니까 5분내에 구출하겠다는 회답이 왔는데 30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요.
출혈은 더 심하고 거꾸로 매달려 있으니까 하체의 피가 얼굴로 역류하여 골이 깨지게 아픕디다.

<생환하자 총살 감이라고 기합>
그러다가 또 의식을 잃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육군 야전 병원 침대 위예요. 얘기 들으니 내가 불시착한 곳은 최전선에서 1리밖에 안됐는데 육군 포병대가 전진하다가 보고 구조한 거예요. 포병대의 연락을 받은 공병대가 기중기로 구조 작업을 했다고 하더군요. 며칠 후 강릉 기지로 후송 돼 2주일간 머리와 허리의 상처, 그리고 땅을 파다 문드러진 손가락 등의 치료를 받고 다시 출격하려고 전 대장 강호륜 중령한테 신고하러 갔더니 총살해야겠다는 거예요.
추락했다 생환한 자는 의당 총살 감이라는 겁니다. 평소부터 하도 무서운 분이라 나는 곧이곧대로 믿고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나 잠시 후 강 대장은 권총을 책상 위에 내던지더니 나를 얼싸안으며 앞으로는 잘 해보자고 하데요. 강 대장한테는 또 한 번 혼난 일이 있어요. 미군 조종사와 합동 편대로 출격했다가 그 미군이 경상을 입었어요. 기지로 돌아와 착륙할 때 부상한 미 조종사에 먼저 양보하고 내가 맨 나중에 내렸어요. 강 대장은 순서를 어겼다고 머리가 핑핑 돌 지경으로 기합을 줍디다. 인정은 이해 하지만 전쟁 중에 군대는 그렇게 해서는 질서를 유지 못한다는 거예요. 지당한 충고라는 생각은 들더군요.>
◆주요일지(1951년10월2·3·4일)
※10월2일 ▲피아 「제트」기 1백93대 공중전 적기7대 격추 ▲이 대통령, 「브래들리」 합참본부 의장과 회담
※10월3일 ▲「유엔」군 6개 사단 서부 전선서 공세 ▲공산 측, 「리지웨이」사령관의 송현리서의 휴전 회담 재개 제의 거부 ▲호지명군, 「하노이」 부근서 대공세
※10월4일 ▲「멘지스」호 수상, 호군1개 대대 한국에 증파 계획 발표 ▲양유찬 대사「히크슨」국무 차관보와 한국 문제 협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