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크 주중 미 대사 돌연 사의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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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전격 사퇴의사를 밝힌 게리 로크(오른쪽 넷째) 주중 미국대사가 지난 6월 티베트 수도 라싸에 있는 조캉사원을 방문해 승려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로크 대사는 중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이에 중국 언론들은 “중국계 대사가 중국을 더 압박한다”며 비꼬기도 했다. [라싸 AP=뉴시스]

게리 로크 주중 미국대사가 20일 갑자기 사임의사를 밝혔다. 그는 중국계 첫 미국대사로 부임 당시 중국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인권 등 민감한 문제에 원칙적으로 대응하면서 중국과 갈등을 빚었고 이것이 사임을 결심한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로크 대사는 이날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달 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물러날 뜻을 밝혔으며 내년 초 시애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사임 배경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부임한 로크 대사는 ‘뤄자후이(駱家輝)’라는 중국 이름을 가진 화교 3세로 미국 워싱턴주의 중국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국 표준어인 푸퉁화(普通話·만다린)뿐 아니라 광둥성과 홍콩에서 쓰이는 광둥어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미국대사직 수행은 순탄치 않았다. 첫 시험대는 부임 반년 만에 터진 ‘왕리쥔(王立軍) 망명 미수사건’이었다. 전 충칭(重慶)시 전 공안국장이었던 왕은 태자당(당과 정부 고위직 간부 자녀 출신 정치세력)의 선두 주자였던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의 심복이었다. 그러나 보의 부인인 구카이라이(谷開來)의 영국인 사업가 살인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와 갈등을 빚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 있는 미 총영사관으로 도피해 망명을 신청했으나 거부됐다. 당시 로크 대사는 왕의 망명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백악관은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이유로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건 이후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심리적 압박을 받았었다”고 밝혔었다.

 인권 문제에도 그는 거침없었다. 지난 6월 말 티베트를 찾은 그는 티베트 현지인들을 만나 열악한 인권 상황을 듣고 그들을 위로했다. 또 자치구 당서기를 만난 그는 티베트 언어, 문화, 종교 보존을 요청하고 계속되는 티베트인들의 분신과 관련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기까지 했다. 당시 중국 정부는 같은 달 초에 있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로크 대사의 방문을 마지못해 허용했다. 그러나 그의 방문 이후 중국 정부는 “티베트 정책에 변화가 있을 수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중국 언론들도 “중국계 대사가 중국을 더 압박한다”며 우회적으로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로크 대사와 중국의 갈등은 지난해 4월 중국의 시각장애인 인권변호사인 천광청(陳光誠)이 연금 중인 자신의 집을 탈출해 미국대사관으로 피신하면서 폭발 직전까지 갔다. 당시 중국 정부는 로크 대사에게 천을 인도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천은 이후 로크 대사의 알선으로 미국으로 가 법학 공부를 하고 있다.

  이 밖에 공식 출장 때도 여객기 일등석이 아닌 일반석을 타고 다니고 커피전문점에서도 할인쿠폰을 쓰는 등 소탈한 처신으로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편 로크 대사의 주변에선 “그가 사임을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의 교육 문제 때문”이라며 “오바마 대통령이 사임을 허락한 것도 청소년인 큰딸 말리아(15)가 있어 그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베이징=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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