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제26화 경무대 사계(5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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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평양 입성>
이박사가 국군수뇌들에게 38선 돌파명령을 내리기 직전 맥아더 사령관은 그 나름대로 결심을 했다. 맥아더 원수는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서는 38선을 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마지막으로 워싱턴 정부의 의향을 타진했다.
『만약 북괴군이 내가 10월1일에 권고할 항복에 응하지 않을 경우 유엔군은 부여된 임무와 작전상의 필요에 따라 적의 무장집단이 한반도에 존립하는 한 이를 색출 공격하여 분쇄한다.』
그러나 워싱턴 측에선 역시 흐리멍텅한 회답만을 보내왔다. 『이 문제를 더 공포하거나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귀관은 필요에 따라 작전을 계속하라. 본국정부는 38선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기를 바라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알아서 처리하라는 책임회피였다. 예정대로 맥아더는 10월1일 방송을 통해『북괴군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전투행위를 중지할 것을 권고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평양은 항복권고를 거부했고, 맥아더 사령관은 유엔군에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맥아더 원수의 총 공격령이 떨어지자 이 박사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박사는 『역시 맥아더 장군은 위대한 군인이야. 이 사람만이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고 구해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이 박사는 미국무성과 무초 주한대사를 퍽 싫어했다.
한국민의 염원과 우리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38선 돌파명령이 내리자 국군과 유엔군의 세 갈래로 나뉘어 일로 북진했다. 그런데 평양점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이 박사는 정일권참모총장에게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
이 박사는 미제1기병사단이 평양으로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국군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래서 국군은 유엔군의 작전명령을 어기면서까지 19일 평양을 미군보다 한발 앞서 점령했다. 평양이 국군에 의해 점령되자 북괴는 적도를 신의주로 옮겼다.
평양탈환의 소식이 보고되자 이 박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됐어, 됐어』하면서 직접 평양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국군이 평양에 입성한지 만 천일 만에 이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참모총장을 대동하고 수송기 편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시청 발코니에 이박사가 나타나자 운집한 군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찬 환호를 외쳐댔다.
이 박사는 시민들에게 『이제 남북동포가 다 함께 모여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됐으니 기쁘기 한이 없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공산치하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지만 이제 모두 힘을 합해 살아가자』고 위로의 연설을 했다.
서울수복직후 남대문거리에서도 겪은 일이지만 이대통령은 경호원을 자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전연 예정에도 없이 군중 속에 섞여드는 것이 그것.
전시 중이었으니 수복지구든 이북이든 어느 곳에나 오열은 있을 수 있고, 그만큼 위험은 항상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평양서 역시 연설을 끝낸 이 박사는 지프를 타고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 악수도 하고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남북으로 갈라졌던 동포들과의 뜨거운 재회, 더우기 통일이 성취되는 너무도 감격스런 시간이었으니 국가원수로선 자연스런 자세였다. 그러나 평양은 탈환한지 겨우 10일밖에 되지 않아 시민에 대한 전반적인 파악이 덜 되었었다.
어디에 패잔병이나 적의오열이 끼어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경호원이나 현지 주둔 민병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고 이대통령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표정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러나 밀려드는 군중을 그 자리서 가려내기는 불가능해 어떤 경호원은 무사하기를 그저 하느님께 기도하는 심경이었다고 했다.
어떻든 이 박사의 평양방문은 아무 일 없이 정말 성공리에 끝났다.
평양을 다녀온 이대통령은 돌아와서도 그날 그 순간의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제 남북동포가 한데 모여 잘 살 수 있는 통일의 날이 멀지 않았구먼』하면서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한편 이 박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는 문제와 피난민구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하루전날 임병직 외무장관을 단장으로 한 유엔사절단을 보냈다.
이 박사는 임 장관에게 한국정부가 작성한 전쟁복구 및 피난민구호계획을 제시토록 유엔의 원조를 요청했다. 그때 사절단이 갖고 간 계획에 따르면 대한원조기관을 유엔이 만들어 20억 달러규모의 원조를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뉴요크에서는 제5차 유엔총회가 열리고있던 참이라 우리 나라의 유엔가입교섭도 아울러 진행됐다.
이 박사는 미국과 유엔을 상대로 한 외교의 중요성에 비추어 임 장관을 미국에 상주시켰다.
외무장관이 1년 이상 자리를 비우고 국외에 머물러있는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벌어져 이 박사는 다음 해로 임 장관을 유엔대사로, 조정환 차관을 장관서리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이박사의 본격적인 1인 외교가 시작된다. <계속><제자는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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