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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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무기휴회>(2)
관계국 정부에 대한 권고를 다룬 제5항의 마지막 의제는1952년 2월 6일부터 분위가 아닌 본회의에서 토의되기 시작하였다. 휴전회담은 쌍방군사령관사이의 모임이기 때문에 협정조인 후에 다룰 정치문제는 한국전 관계국정부에 건의, 토의케 하자는 것이 의제 제5항의 취지였다. 그러므로 다른 안건에 비해 별로 직접적인 까다로운 문제가 없을 성싶었지만 제5항의 토의도 2주일이나 끌었다.
2개월만에 처음 재개된 본회의에서 남일은 『휴전협정 조인 후 3개월 안에 쌍방이 5명씩 참석하는 고위정치회담을 열고, ①외군 철수 ②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③한국평화에 관련 있는 기타문제의 3개 항목을 토의 해결토록 관계국정부에 건의하자』고 제안하였다. 남일의 이 제안에는 두 가지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었다. 그 하나는 휴전후의 정치회담에 대한민국참석을 의식적으로 봉쇄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평화와 관련 있는「기타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중공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나아가서는 「유엔」가입까지 시도하려고 한 것이다.

<9초안에 끝난 회의도>
「조이」제독은 정치회담 의제는 한국문제에 국한하라는 「워싱턴」훈령을 감안하여 새 제안을 내놓았는데 공산 측 제안과 대조하면 다음과 같았다.
①▲「유엔」측 비 한국군의 철수 ▲공산 측=전 외국군의 절수
②▲「유엔」측=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공산 측=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③▲「유엔」측=평화에 관련된 한국의 기타문제 ▲공산 측=한국평화와 관련된 기타문제
제1항과 제2항의 양측제안은 대동소이하여 별로 문제될 게 없었으나 제3항은 정 반대되는 해석이 나올 수 있었다.
이 3항의 공산 측 제안에 대해「유엔」측이 반대하자 남일은 제안 어구를 「기타문제 등등」으로 수정하였는데 「조이」제독은 회담 진전의 촉진을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부로 공산 측의 수정제안을 수락하였다.
①이쪽 편의 관계국정부에 대한 권고는「유엔」군 사령부가 대한민국 및 「유엔」 각국에 대해 행한다. ②외국군대는 비 한국군을 의미한다.
③「등등」이라는 용어는 한국문제이외에 관련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한다.
공산 측도 이 조건을 양해함으로써 의제 제5항 토의는 2월 19일에 끝났다. 1952년 4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회담에서 쌍방 견해가 대립된 문제로서는 제3항의 비행장 재건금지, 소련의 중립국여부와 제4항의 포로교환의 기본절차 등 3대 안건만이 남았는데 공산 측은 이 세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타협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 무렵의 의제 제3항과 4항을 다루는 분과위 회의는 비밀로 진행되었는데 서로「최종적」 혹은 「타협할 수 없는 주장」 등 짤막하게 설전을 벌여 4월 14일의 회의는 불과 9초만에 끝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유엔」측은 마지막이라고 볼 수 있는 타협안을 제출하였다. 이 안은 동경에 간「조이」대표가「리지웨이」사령관과 숙의하여 작성한 것으로 만약 이 안마저 공산 측이 거부한다면 5월중에 회담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고 육해공으로 일제히 군사적 압력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유엔」군 측이 4월 28일의 비밀 본회의에 제출한 중대제안은 쌍방 주장을 모개로 한데 묶어 상살 타협하자는 것으로 골자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공산 측이 소련을 중립국으로 지명한 것을 포기한다면 「유엔」측은 휴전후의 비행장건설 금지문제를 양보한다.
②「유엔」군 측은 1만 1천 명의 「유엔」군 포로와 송환을 희망하는 7만 명의 공산포로와의 교환을 제의한다.
③휴전 성립 후 국적기관은 쌍방 「업저버」와 함께 송환반대 포로와 회견하고, 이 때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는 즉시 돌려보낸다.

<신임수석대표에 해리슨 중장>
「조이」제독은 이 제안을 내놓으면서 『이 안은 분할해서는 안될 모개 제안이며 현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제안을 더 쉽게 풀이하면, 비행장 재건금지와 소련 중립국참가를 상살하여 4개의 중립국으로 할 것과 포로문제에 있어서는 「유엔」군 측이 자유송환 원칙을 포기할 수 없지만 포로교환 후 석방하려던 반공포로들을 제3자로 하여금 회견시켜, 다시 한번 송환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유엔」군 측으로서는 최대한의 양보였지만, 공산 측은 이를 즉석에서 거부하고 13만 2천 4백 74명의 전 공산포로를 무조건 송환하라고 강변하였다. 「유엔」군 측은 이 마지막 타협안에 큰 기대를 걸었던 만큼 실망도 컸고 일부대표들은 회담무용론까지 주장하였다.
「조이」제독은 동경으로부터 급히 날아 온 「리지웨이」사령관에게 계획한 대로 회담의 일방적 중단성명을 발표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이는 「워싱턴」의 지시로 보류되었다. 한편 5월 23일에 「유엔」군 측 수석대표의 경질이 있었는데 「조이」제독은 부하들에게 대한 이임사에서 『적을 납득시키는 최선의 길은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길뿐이며 10개월간의 회담을 회고할 때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아프다』고 말하였다. 워낙 기관지염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조이」제독은 회담의 고심으로 한결 더 수척해졌다. 「윌리엄· K·해리슨」 중장이 신임수석대표로 취임한 후 회담은 사실상 휴회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졌다.
이 동안에「워싱턴」은 회담의 일방적 중단은 보류하였지만 그 대신 적에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북한의 78개 도시와 수풍 「댐」 폭격을 승인하였다. 이래서 미 공군은 북한 전역을 샅샅이 누비며 폭탄세례를 가하게 된 것이다. 특히 6월 23일 감행된 수풍 「댐」 폭격은 중대한 의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날 5백 대의 B-29와 「제트」전투기가 수풍발전소를 폭격했는데 그 위치가 한만 국경 상에 놓여 있고, 또한 「댐」 자체를 중공과 북괴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공산 측이 휴전회담에 계속 성의를 보이지 않을 때는 만주폭격도 불사하겠다는 경고로 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풍폭격이 휴전회담 권고의 「마리크」성명이 나온 지 꼭 한 돌만에 감행됐다는 것도 주목할 만했다.

<회담, 감정적 언쟁으로 시종>
미 공군이 북한 전역을 강타하는 가운데 「유엔」군 측은 7월 1일에 포로교환의 기초가 되는 포로의 재분류를 제안하였다. 이 재분류 안은 지난 4월에 행한 분류를 재확인하고 송환희망포로에 한하여 명단을 작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 측은 여전히 포로 전원의 강송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7월 하순부터 회담은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1주일 휴회와 10일 휴회가 반복됐는데 종전 같은 쌍방의 합의에 의한 휴회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양측대표는 노기에 찬 가운데 퇴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7월27일(1주 휴회=남일 제의) ▲8월3일(1주 휴회=「해리슨」제의) ▲8월11일(1주 휴회=「해리슨」제의) ▲8월19일(1주 휴회=「해리슨」 제의) ▲8월27일(1주 휴회=「해리슨」제의) ▲9월4일(1주 휴회=「해리슨」제의) ▲9월12일(1주 휴회=「해리슨」제의) ▲9월20일(1주 휴회=남일 제의) ▲9월28일(10일 휴회=「해리슨」제의) ▲10월8일(무기 휴회=「해리슨」 제의)
이와 같이 8회에 걸친 1주 휴회와 1차의 10일 휴회 끝에 판문점 본회의는 6개월 동안 무기휴회로 들어간 것이다. 휴회 직전의 회담은 서로 감정적인 언쟁으로 시종 됐고 특히 남일은 입에 담지 못할 「천치·살인도배·독재자·제국주의자·괴뢰」등의 독설을 서슴지 않고 늘어놓았다. 그런데 「유엔」군 측은 9월 28일 회의에서 지난 4월 28일 안에 약간 손질을 한 최종안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은 첫째로 송환반대포로는 비무장지대에서 석방된 후 자기가 선택한 곳에 자유로 돌아갈 수 있고 둘째로 거기서도 송환에 반대하는 자는 중립국으로 보내 자기 희망 국으로 가도록 보장하며 세째로 포로교환 직전에 명부를 대조하며 자기가 억류된 곳으로 가겠다면 이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무기휴회선언에 남일 주춤>
10월 8일에 「해리슨」수석대표는 이 세 가지 방안 중 택일하여 송환반대포로문제를 해결하자고 했으나 남일은 여전히 전원 대 전원의 포로 전원교환 원칙을 고집하였다. 이렇게 되자 「해리슨」 중장은 이상 더 회담 계속이 필요 없다고 단정하고 무기휴회를 요구하였다. 그는 마지막 회담이 결렬되던 날에 남일을 노려보며 이렇게 쏘아 붙였다. 『이상 더 말해 보았자 소용없고 입만 아플 뿐이다. 내가 한 말을 당신네들이 똑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길은 내가 이 자리를 떠나는 것뿐이며 이 방법만이 당신네들을 정신차리게 할 것이다. 』 이 말을 듣고 주춤한 남일은『잠깐만 할 말이 있으니』라고 손을 내저었으나,「해리슨」중장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이렇게 해서 본회의는 개최 1년 3개월만에 1953년 4월 25일까지 근 6개월 동안 무기휴회로 들어간 것이다.
◆주요일지(1951년 9월 5,6,7일)
※9월 5일▲아군,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완전 점령 ▲대일 강화조약회의 개최
※9월 6일 ▲연천 북방에 적 「탱크」 출현 ▲「유엔」군 측, 휴전회담연락장교회의 개최제의 ▲일본정부, 공산당 간부 19명 추방 결정 ▲미·「포르투갈」군사협정체결
※9월 7일▲철원 서북방서 적 공격 격퇴 ▲「트리그브·리」「유엔」사무총장, 휴전회담교착에 실망 표명 ▲대일 강화조약회의 참석의 소련대표단 암살계획 발각 ▲ 「맥아더」원수, 「클리블런드」에서 「트루먼」 행정부 비난 연설
※알림=휴전회담개막(전반부)은 이번 회로 끝맺고 반공포로석방, 인도군의 포로관리, 한미교섭, 협정 조인 등은 휴전회전(후반부)에서 다를 계획입니다. 4윌 3일(월)부터는 「하늘의 전쟁」(한미공군의 활약상)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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