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걷고 싶은 거리는 무슨? 속 터지는 거리 됐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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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서울 역촌동 서부시장길 걷고 싶은 거리 모습. 31억8000만원을 들여 만든 이 거리에 불편 민원이 끊이지 않자 은평구청은 10억원을 들여 원상복구 공사를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12일 오후 3시 서울 역촌동 서부시장길. 포클레인 2대가 보도를 뜯어내고 땅 다지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길은 2004년 은평구의 걷고 싶은 거리로 선정됐다. 당시 2차로를 없애고 빨간 투수콘과 모자이크 점토벽돌로 치장했다. 하지만 투수콘 바닥이 일어나는 등 하자가 발생하자 2009년 아스팔트로 덮어버렸다. 이번 철거 공사에서 가로수 1만 그루와 화단도 모두 제거됐다. 당시 31억8000만원을 들여 만든 S자형 일방통행로를 2차로로 원상복구하기 위한 작업이다. 원상복구 공사엔 10억원의 예산이 들어갔다.

관리 안 해 곰팡이에 바퀴벌레 득실

 지역 주민들은 원상복구 공사를 되레 반겼다. 이곳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박영란(48)씨는 “걷고 싶은 거리가 조성되면서 마을버스 노선이 사라진 데다 소방차나 응급차도 다니지 못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화단은커녕 벌레들의 온상이었다”며 바퀴벌레 수십여 마리가 화단에 모여든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걷고 싶은 거리의 역사는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건 서울시장은 보행환경 기본계획을 수립하며 “구마다 한 곳 이상 걷고 싶은 거리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목표는 자동차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길 만들기였다. 62억원이 투입돼 광진구 광나룻길 등 25개 자치구마다 한 곳씩 걷고 싶은 거리가 생겨났다.

 서울시가 예산을 지원하니 구청장들은 앞다투어 걷고 싶은 거리 조성에 뛰어들었다. 2000년과 2001년에 진행된 1·2차 걷고 싶은 거리 사업에는 각 87억7000만원(서대문구 신촌길 등 8곳)과 57억원(강남구 압구정로 등 12곳)을 들여 총 20곳이 만들어졌다. 당시 서울시정연구원으로 근무했던 경원대 정석(도시설계학) 교수는 “주민이 주도하고 행정기관에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가야 하는데 지자체가 일방적으로 정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단체장과 주민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이 동네 통장을 했던 김상영(54)씨는 주민 1369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넣었다. 그 결과 지방자치법 8조 1항에 명시된 ‘국민 편의와 복지를 위해 애써야 한다’는 조항에 위배된다는 답변을 받아냈지만 소용없었다. 시·구의원들도 서부시장길 원상복구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2010년 노재동 은평구청장의 임기가 끝난 뒤에야 공론화가 가능했다. 김씨는 “홍대와 건대입구를 벤치마킹했는데 이곳 주택가는 성격이 너무 달랐다”고 말했다.

 2001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도 ▶적절한 대상지 선정 기준이 없었고 ▶주민 의견 수렴과 현장조사가 미흡했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2005년 31억원을 들여 만들어진 양천구 신월1동 걷고 싶은 거리도 지난달 원상복구 공사를 마쳤다. 주민 김영광(32)씨는 “오래된 다세대주택이 많아 주차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며 “그렇잖아도 주차난으로 고생하는 골목길을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든 것은 탁상행정”이라고 했다. 주차장을 헐어 만든 거리는 불법주차가 심각해지자 6억9000만원을 들여 다시 주차장으로 복원됐다.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 김은희 사무총장은 “단체장들이 빨리 성과를 내려다보니 치적쌓기용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수십억 들여놓고 일부 원상복구 중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디자인 서울 거리 사업을 벌였다. 2007년 439억원이 투입돼 대학로 등 10곳, 2008년 894억원을 들여 삼청동길 등 20곳을 치장했다. 당시 대학로 실개천에 33억원을 들여 플라스틱 커버를 씌웠다. 하지만 현재는 곰팡이와 이끼가 잔뜩 낀 흉물로 방치돼 있다.

 서울시엔 관리를 책임지는 부서도 없다. 본지 확인 결과 2002년 고건 시장 퇴임 이후에만 최소 20여 곳의 걷고 싶은 거리가 신설됐으나 서울시는 해당 명단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오세훈 시장 퇴임과 함께 사라진 디자인서울총괄본부의 업무는 공공디자인과로 계승됐으나 관리 업무는 하지 않는다. 박현찬 서울시 도시설계 선임연구위원은 “당시 일관성 있는 사업 추진을 위해 업무전담조직의 신설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제안했었다”고 해명했다. 서울시 보행자전거과 관계자는 “2010년 과가 신설되면서 전체 길에 대한 관리 총괄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면서도 “다만 보행이라는 게 워낙 여러 분야에 걸쳐 있어 한쪽에서 몰아서 하는 게 과연 효과적인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다”고 말했다.

글=민경원·구혜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문제점 뭔가 했더니 …

● 구마다 한 곳 이상 조성 일방적 지시
● 적절한 대상지 선정기준 부재
● 시장 임기 끝나면 주무부서 통폐합
● 사업 시공 이후 관리 부서 없음
● 비슷한 내용 담은 유사사업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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