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령 대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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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생이 취직을 했다.
마땅히 온 식구가 기뻐하고 축하해 주어야 할 취직이었지만 동생의 얼굴도 시무룩했고, 그를 지켜보는 식구 역시 밝은 마음은 아니었다. 대학대신 택한 취직. 고3, 2학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동생은 책상 앞에, 멍청한 얼굴이 되어 앉아있곤 했다. 전처럼 참고서를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았고 공부하게 조용히 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동생의 모습 뒤에서 나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숨길수가 없었다.
1970년 11월 인천교육대학 부설초등교원 양성소를 뒤로하고 나오던 날, 나는 손에 쥐어진 수료증이 발령장이나 되는 듯 높이 흔들어 보이며 집으로 달려왔었다.
곧 발령이 날 거야, 동생에게 한 눈을 찡긋해 보이며 나는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뜻을 비쳤다.
착하고 슬기로운 나의 동생에게 내가 거는 기대이상의 것이었다. 내가 못 이룬 꿈을 동생이 이루어 주기를 나는 맘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길가에 무심히 놓여진 돌 하나, 그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은 지식의 눈으로만 캐낼 수 있다. 우매한 짐승처럼 살아가며 나는 모르고 지나가더라도 너만은 많이 배우고, 깨닫고, 알아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는 눈으로 살아라, 그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동생의 대학진학 뒷받침은 내가 해주기로 동생과 나 사이의 묵계는 그렇게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발령소식은 오지 않았다.
몇 차례 도 교육위원회에 서신문의를 했고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대답은 언제나 간단했다.『기다려라.』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아직도 기다리고있다. 동생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사회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멍청히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조용히 하라, 그리고 기다려라, 희망은 갖지 말고. 왜냐하면 희망이란 그릇된 것에 대한 희망일지니.』
「T·S·엘리어트」의 싯귀를 내 나름으로 해석하며 동생의 우울한 취직 뒤에 서있는 나는, 참으로 못나고 못나고 또 못났다. 김숙희(경기도 양평군 양평리 양근리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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