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앨라배마·조지아 공장 잇는 134㎞ 협력사 '상생벨트'에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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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1일(현지시간) 오후 4시 미국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 기아차 조지아 공장을 나선 버스는 곧 85번 고속도로를 올라탔다. 10여 분을 달리자 ‘대원’ ‘만도’ 등 낯익은 한국 이름의 회사 입간판이 보였다. 대원은 조지아 공장에 서스펜션용 코일스프링을 납품하는 업체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이 생기면서 2006년 미국 법인을 세웠다. 지금은 조지아 기아공장은 물론이고 GM과 크라이슬러에도 물건을 댄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현대차를 따라나온 작은 기업이 미국 자동차업체에 납품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이 업체의 모기업인 대원강업 전체의 지난해 매출액은 1조58억원, 종업원 수는 1909명에 이른다. 김충훈 대원아메리카 법인장은 “현대·기아차가 조직력과 추진력으로 미국 시장을 열었고, ‘상생벨트’의 힘을 통해 우리도 함께 성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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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말한 상생벨트는 85번 고속도로에 접한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차 조지아 공장(직선거리 134㎞) 주변에 들어선 협력 업체들을 말한다. 현대·기아차 공장에 납품하는 100여 개의 업체가 몰려 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모비스·동원·세종·파워텍 등의 업체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버지니아주에서 앨라배마주까지 이어지는 1076㎞의 85번 도로에서 이 지역은 원래 목화밭이었다. 현대·기아차가 들어오면서 이곳에 공장이 생기고 일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조지아 공장에서 생산·공정관리를 담당하는 클레이 밀러(30)는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도 많이 내는 기아차에 대해 지역민들이 모두 고마워하고 있다”며 “기아차는 나를 비롯한 지역 주민들에게 빛과 소금 같은 존재”라고 극찬했다. 조지아주의 주지사가 틈만 나면 기아에 추가 공장 설립을 호소할 만한 상황인 셈이다.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기아차 공장에서 직원이 차량의 램프 주변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기아차]

 상생벨트의 공장들은 최근 2~3년 새 부쩍 바빠졌다. 현대·기아차 공장이 3교대를 시작하면서다. 대원아메리카도 생산라인을 두 배로 증설했다. 128명이던 직원도 255명으로 늘렸다. 현대·기아차에 각각 연 30만 대 분량을 공급하던 것이 6만 대씩 늘었기 때문이다. 김충훈 법인장은 “기아차의 3교대가 안착되면서 매출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2010년 5600만 달러였던 대원 아메리카의 매출은 올해 1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다른 업체에도 훈풍이 불고 있다. 2008년만 해도 미국에 동반 진출한 현대·기아차 협력사의 총 매출은 2조3800억원(1차 협력사 30곳 기준)이었다. 그러나 2010년 6조1600억원으로 늘어났고 지난해에는 9조4100억원에 달했다. 급변하는 생산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기술이 좋아지면서 협력업체의 자생력도 커졌다. 현대·기아차가 아닌 다른 자동차 업체에 납품하는 실적이 덩달아 늘어난 것이다. 2010년 협력업체가 현대·기아차 외 다른 브랜드에 수출한 부품은 총 8조8000억원이었으나 지난해에는 18조1000억원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협력사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면 장기적으로 현대·기아차의 경쟁력에도 큰 도움이 된다”며 “과거에는 우리가 끌어주는 동반 성장이었다면 앞으로는 서로 이끌어 주는 동반 성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차의 랜디 잭슨 부사장은 “조지아 공장은 젊고 빠른 공장”이라며 “전통적으로 2교대제가 일반적인 자동차 산업에 기아차가 새바람을 몰고 왔다”고 말했다.

 기아차가 2011년 6월 3교대제를 도입한 것은 밀려 오는 주문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아차는 ‘10시간+10시간’이던 주야 2교대 근무제를 ‘8시간+8시간+8시간’의 24시간 3교대 생산체제로 전환했다. 이후 속도가 눈에 띄게 향상됐다. 2010년 15만3665대였던 연간 생산량이 2011년 27만3517대로 늘었고, 지난해는 35만8620대까지 올라섰다. 한국공장이 올 3월 주야 2교대에서 ‘8시간+9시간’의 주간 연속 2교대로 전환하면서 생산시간을 하루 3시간 줄인 것과 대비된다.

 조지아 공장은 3교대제를 바탕으로 올 7월 현대·기아차 생산공장 가운데 최단 기간인 44개월 만에 누적 생산대수 100만 대를 달성했다. 이곳에서는 차 한 대를 15.9시간이면 만든다. 현대차 국내 공장은 거의 두 배 수준인 28.4시간이다. 조지아 공장은 생산성이 높은데다 생산 시스템도 한국보다 유연하다. 이날 조지아 기아 공장에선 H자가 선명한 현대차 모델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있었다. 현대차 싼타페였다. 혼란을 막기 위해 싼타페에는 노란색, 쏘렌토에는 초록색으로 스티로폼을 입힌 것을 빼면 작업 과정에서 다른 점을 느끼기 어려웠다. 심지어 이곳의 현대·기아차 공장은 교차 생산도 한다. 앨라배마 공장에서는 엔진을, 조지아 공장에서는 변속기를 생산하는 식이다. 이 덕분에 공장을 더 짓지 않고도 필요한 차종의 생산만 늘릴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조지아 공장에서 쏘렌토와 플랫폼이 같은 현대차 싼타페를 생산하고, 현대차 공장에서는 공급량이 부족한 쏘나타와 아반떼를 추가 생산한다. 현대차 울산 공장에선 작업 환경을 하나 바꾸는 데도 노조와 협의를 해야 해 이런 교차 생산은 엄두도 못 낸다.

 3교대가 정착되고, 덩달아 상생벨트에 활기가 도는 데는 정부와 노조의 역할도 컸다. 3교대제가 되면서 기아차 공장은 당장 일손이 달렸다. 단기간에 823명을 신규 채용하는 데 주정부가 발벗고 나섰다. 주정부는 11만9000㎡(3만6000평)의 연수원을 제공하고 인력 채용을 지원하는 등 신규 인력 수혈을 도왔다. 노조 역시 3교대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임금 삭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기아차 관계자는 “미국 근로자들은 작업시간 감소로 임금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며 “가족 중심 문화로 인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며 좋아하는 분위기도 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작업 환경이 바뀌었어도 설렁설렁 일하지 않는다. 이날 오후 2시30분 기아차 공장에선 오후 업무조가 교대에 앞서 공장 곳곳에 마련된 ‘팀센터’로 모였다. 3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된 팀센터에는 길이 3m의 화이트보드가 있다. 근무 투입 전 U자형으로 둘러서서 오전조의 생산 현황을 파악하고 안전지수·품질지수·효율성·비용 등을 자체 평가하는 ‘말발굽 회의’가 열린다. 조지아 공장은 이 말발굽 회의를 통해 생산성 향상과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고 있다.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지난해 입사해 도장라인에서 일하는 프레드 인그램(35)은 “전 직장에 비해 기아차는 글로벌 기업답게 복지나 근무 환경이 잘 갖춰져 있다”고 말했다. 잭슨 부사장은 “조지아 공장이 단기간에 3교대 전환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노조·회사 3박자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웨스트포인트(미 조지아주)=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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