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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제자는 필자|<제24화>발명학회(1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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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5전까지 존속>
새로 단일화한 과학보급협회는 한동안 뒤에 회장 윤치호씨 부회장 원익상씨, 그리고 상무이사인 나의 3인체제로 이끌어 나갔다. 전무이사였던 김용관씨와 상무이사였던 김희명씨는 협회를 떠났으므로 새로운 체제로 이끌어 나가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성진으로 갔던 김희명씨는 뒤에 다시 되돌아와서 촉탁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름이 과학보급협회 일 뿐 전쟁이 계속되면서 과학「데이」행사도 할 수 없었고 「과학조선」도 제대로 발간할 수가 없었다.
과학「데이」에 견학 단을 소규모로 조직해서 몇몇 곳을 찾는 것이 고작이었다.
용지 등 물자 부족으로 「과학조선」은 간간이 발항했지만 5백부정도 인쇄하면 잘 팔려나갔던 것이다. 시조사의 간행물을 다루던 분이 「과학조선」도 다뤘는데 정가가 30전으로 오른 「과학조선」을 파는 것보다는 그 잡지를 회원에게 주고 「배지」비와 회비를 받는 수입이 훨씬 컸다.
그러나 전쟁이 한창인데도 발명가의 수는 별로 감소를 보이지 않아 출원사무를 통해 들어오는 수입이 꽤 많았다.
출원사무를 대항해주는 경우 착수금은 특허가 30원, 실용신안이 25원이었으니까 꽤 비쌌던 샘이다. 그리고 심사를 통과하면 사례금으로 착수금의 배를 받았다.
물론 착수금을 낸다고 하고 나서 안낸 사람도 있고 사례금에 있어선 시치미를 떼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튼 출원업무로 들어오는 수입이 좋았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다만 수입이 일정치 않은 것이 문제였다. 발명 「아이디어」는 시류를 타야 히트하는 율이 많은 법인데 전쟁시의 물자부족을 틈타 한몫 본 발명가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문용채씨는 대용피혁으로 재미를 보았지만 지금 김천서 3백 여명의 직원이 일하는 환선철공소를 경영하는 선호익씨 같은 분은 송풍기의 고안으로 기반을 닦았다. 송풍기는 왕겨를 땔때 바람을 불어주는 것인데 농촌의 웬만한 가정에선 사용해본 기억이 날것이다.
최형욱씨는 구조가 간단하고 화력이 강하다는 연탄 「스토브」를 고안했으며 윤병혁씨는「오토바이」용으로 구조가 간단한 증기 「엔진」을 개량해 내 기도했다. 이규하씨는 발만 끼우면 되는 개량 「게다」날것을 고안해서 큰 돈을 벌었다. 최준용씨는 고무와 피혁대용으로 나온 것을 나뭇바닥에 붙인 목저화란 것을 고안했다.
그밖에도 머리카락을 꼬아 「스프링」으로 쓰는 방법을 고안한 사람, 나다닐 때는 치마지만 일할 땐 쉽게 걷어올리는 여자하의를 고안한 사람 등 시세를 탄 발명자가 많이 쏟아져 나왔다.
전쟁이 말기로 접어들게 되면서 과학보급협회도 별수 없이 침체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말기에 가까워서 유광렬(한국일보논설위원)씨가 과학보급협회에서 일을 본 일이 있다. 유씨는 일찍이 「과학조선」사 이사로서 잡지 편집에 크게 도움을 준바있었다.
뒤에 매일신보편집국장이 됐다가 일본경찰의 압력으로 파면된 다음엔 「요시찰인」으로 노상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래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중 어느 해인가의 음력 설날 아침에 원익상씨가 찾아갔더라는 것이다. 원씨는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상태인 유씨에게 1백원을 주고 쌀과 나무를 사라고 하면서 과학보급협회에 나올 것을 시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씨도 과학보급협회의 직원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말기이던 44년말께 가서 징용도 피하고 형사의 감시도 벗어나기 위해 유씨와 나는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일산)에 송탄유공장을 차려 종전될 때까지 거기서 피신을 했다. 해방 전 7, 8개월 동안은 과학보급협회와 손을 때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때의 사정은 아주 모호하다.
그런데 그때의 사정과 과학보급협회의 종말에 대해선 고 원용덕 장군의 이종사촌 동생이며 41년부터 발명협회와 과학지식보급회의 경리담당자로 있었던 이수복씨(서대문구 만리동 2가62의2)가 소상히 알고 있다. 이씨에 의하면 내가 없었던 그 시기에 과학보급협회가 사무소를 낙원동의 협성실업학교(뒤의 정치대학·지금의 건국대학교)건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친일파이던 박춘금씨가 얼마전에 작고한 유석창씨가 산 그 건물을 뺏으려 했기 때문에 유씨가 배경이 튼튼한 과학보급협회의 원익상씨한테 청해서 사무실을 옮겼던 것이라고 이씨는 설명한다. 그 무렵 원씨가 이씨더러 자금을 마련해 달라해서 강원도 홍천에 있는 땅과 집을 팔아 집어넣은 것이 종전으로 몽땅 없어졌다고 말하면서 이씨는 지금도 쓴웃음을 가끔 짓는다.
해방 뒤에도 한동안 낙원동에 있다가 서울 시경 옆 건물로 이사를 했다. 원씨는 해방 뒤에도 과학보급협회를 키우려고 집념을 불태운 결과 사무소를 새로 차리는 한편 여러 사람을 설득하러 다녔으나 해방 뒤의 혼란 통이라 제대로 성사가 안됐다고 한다.
사변 나기 얼마전 그러니까 원씨가 별세하기 얼마전이기도한 시기에 남대문 지하도 근처에서 만났더니 과학보급협회관계 서류를 싼 보자기를 흔들면서 『이것을 키워야할텐데…』하더라는 것이다. 결국 원씨의 별세와 6·25사변으로 과학보급협회는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이 그 협회를 끝까지 지킨 당사자의 한사람인 이수복씨의 증언이다. <끝>

<다음은 이서구씨의 「카페」시절얘기> 【목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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