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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민주주의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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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오늘날 세계의 보편적 정치제도로 자리 잡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제대로 정착된 지 200여 년에 불과하다. 그것도 재산의 유무나 성별에 관계없이 일인 일표를 행사하는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역사는 9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 민주주의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우려와 경고는 과거처럼 신생국이나 개도국들에서가 아니라 바로 원산지인 유럽과 미국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러한 경고음들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은 바로 세계화·고령화·정보화라는 이 시대의 세 가지 큰 추세가 민주주의에 내재한 원래의 취약성과 접목되어 이를 점점 더 깊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거의 단일시장처럼 통합되었고,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으로 지구촌은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어떤 국가도, 경제도, 사회도 오늘날 이웃에서, 혹은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는 24시간 내에 전 세계에 쓰나미 같은 파급효과를 가져왔으며 2010년의 유럽 재정위기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는 작은 나라지만 유로존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이는 곧 다시 세계 경제를 흔들었다.

 반면 오늘날 주권국가라는 국체와 그 주권국가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세계 경제 문제에 대해 어느 하나 제대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경제 문제는 세계적(global)이나 그것을 풀어 나가야 하는 지도자들의 권한과 책임은 국가적(national)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늘날 세계 경제 문제를 ‘리더십의 부족’ 때문이라고 하나 근본적으로는 ‘제도의 실패’가 주요인이다. 그리스는 유로존 경제의 2%밖에 되지 않으나 그리스 문제가 유로존을 위협하는 것을 유럽의 지도자들은 풀지 못한다. 메르켈 총리나 올랑드 대통령은 유로존이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 국민에 의해 선출된 것이며 그들 국민에게서 표를 얻지 못하는 어떤 정책도 추진하기 어렵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요구되는 유럽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없다.

 민주주의 제도에 의해 선출된 오늘날 어떤 국가지도자도 세계적 문제에 리더십을 가지고 풀어나가기는 어렵다. 미국의 수퍼파워 시대가 지나가고 세계가 점차 다극화되어 나가면서 이러한 문제는 더 깊어지고 있다. 주요20개국(G20)을 출범시켜 국가 간 공조·협력을 추구해 왔지만 금융위기로 인한 공동 위기의식이 사라진 지금 이는 다시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세계정부의 부재와 국내 민주주의의 한계가 겹치면서 오늘날 세계 경제의 리스크는 점점 커져 가고 있으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고령화는 지금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다. 피임술과 의학의 발달로 출산율은 낮아지고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일찍이 인류 역사에서 이 시대처럼 노인 인구의 비중이 큰 적은 없었다. 이 추세는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큰 취약점 중 하나는 미래 세대가 오늘날 투표에 대표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령 유권자 비중의 증가와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율 저조로 각국에서 점점 더 미래 지향적 정책이 퇴조하고 있다. 연금, 조세, 국가부채, 의료, 복지, 부동산 정책 등은 모두 세대 간 이해가 충돌하는 부문이다. 오늘날 대의민주주의하에서 이 분야들에 대한 정책 결정은 미래 세대의 부담을 높이고 현 세대의 이익을 보호하는 포퓰리즘적 성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증세·연금개혁은 더 어려워지고 복지제도 확대는 더 쉽게 채택된다. 현 세대에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은 뒤로 미룬 채 중앙은행의 저금리, 통화팽창에 기대어 쉽게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장기적으로 경제활력을 떨어뜨려 경제성장률을 하락시키며 실업률을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 확산으로 언론매체들이 경쟁적으로 점점 자극적, 일과성 헤드라인을 쏟아내는 것도 정책의 단기화와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빨리 이뤄냈다고 자부해 왔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잘 작동하고 있는가? 민주화 이후 단임정부하에서 정책의 시계는(視界)는 점점 짧아지고 있으며, 정쟁에 갇혀 미래 지향적 정책들을 소화하지 못하던 국회는 소위 선진화법으로 점점 더 마비되어 감을 본다. 온 사회가 일과성 이슈에 몰입되고 정작 풀어야 할 과제들은 흘러갈 뿐이며, 구조적 취약성은 적체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밖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더 깊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를 보완해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한국은 지금 이 중요한 물음 앞에 서 있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