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제23화-가요계 이면사(7)|고복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배우출신 가수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요계는 요람기를 벗어나 황금시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배우이면서 노래를 부른 사람이 많았다.
강석연도 김연실 복혜숙 석금성 전옥 신카나리아 윤백단 신은봉 등은 극단에서 연극배우이면서 막간에서 노래를 불러 인기를 차지했다.
강석연은 뒤에 이애리수가 부른 「정한의 밤 열차」를 「리바이벌」하여 인기를 끌었다.
복혜숙도 막간에서 노래를 부른 일이 있으나 가수의 길은 아니었고 전옥은 노래로서 출발했다가 「비극의 여왕」이 된 것이었다.
전옥의 본명은 전덕례, 고향은 함남이었는데 연극 「항구의 일야」 주제가 「항구의 일야」를 훌륭하게 불렀고 「레코드」에 취입 「히트」했었다.
나는 「콜럼비아」사의 「콩쿠르」에 당선했으나 곧 취입할 기회는 없었고 따라서 말만 전속이었지 실속이 없어서 이철의 OK「레코드」로 옮겨 결국「콜럼비아」의 행사에 당선했으나 「콜럼비아」의 전속가수로 되어보지 못했다.
「콜럼비아」는 상금으로 걸었던 전속료 1천원과 월급 한달 40원은 「레코드」취입이 시작되는 날로부터 1년을 계산하기로 되어있어서 갖고 왔던 하숙비로 신사복을 장만했던 나는 몹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OK「레코드」에 있던 손목인이 나를 「스카우트」하러 찾아 왔었다.
손목인은 나에게 『「콜럼비아」전속으로 가면 가수로서 성장이 늦어진다』는 것이었다.
당시「콜럼비아」에는 채규엽과 강홍식이 있어 좋은 곡은 이들 선배에게 주고 이들 선배가 부르기 싫어하는 곡만 돌아올 터이니 손해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1천원을 받고 OK로 옮긴 것이었다.
손목인의 본명은 손득렬이다. 진주 사람인데 18세에 배재를 졸업하고 도일, 「무사시노」(무장야) 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돌아와 OK 「레코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OK에는 당시 문예부장에 김능인, 작곡에는 가요계의 대 선배인 문호월이 있었는데 그는「노들 강변」을 작곡한 사람이었고, 손목인을 발탁한 사람이었다.
문호월은 김천 사람으로 제금가였고 「노들 강변」이외에 「관서천리」「앞 강물」등 민요조 가락의 작곡을 즐겼으며 노들 강변은 당시 명기로 날렸던 박부용이 불러 크게 유행했었다.
뒤에 「앞 강물」을 작곡했고 이것은 이은파가 불렀는데 이은파는 문호월의 처였다.
문호월과 이은파의 인연은 공연에서 시작되었다. 1927∼8년께로 생각되는데 문호월이 평남·북 지방을 순회 공연중 진남포에서 평양기생 이은파의 방문을 받은 것이었다.
문호월이 투숙한 여관으로 방문해온 이은파는 『가수로 이끌어 주세요』라고 청했고 문호월은 즉석에서 「테스트」해보니 목소리가 쓸만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훗날 기회 있으면 『서울로 오라』고 하면서 명함 한 장을 주고 왔는데 얼마 후 이은파는 보따리 하나를 들고 서울로 문호월을 찾아왔었으며 이은파를 위한 작곡을 하는 사이 사랑이 싹터 동거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노들 강변」을 부른 박부용은 서도민요의 명창이었다.
내가 OK「레코드」로 갔을 때 OK에는 남자가수는 없었고 여자가수로서 백화선 이난영이 있었다. OK에서 남자가수에 서창식이 있었으나 여가수와 사랑놀이를 하는 바람에 회사규칙을 어겨 엄격하기로 유명한 이철 사장이 파면하다시피 쫓아낸 직후였다.
나는 이듬해인 3월에 첫 번째로 「레코드」에 취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는데 경성 역에서 「콜럼비아·레코드」회사 직원과 싸움을 벌였다.
문호월과 손목인, 나와 이난영의 4사람이 기차를 타려고 나가는데 「콜럼비아」의 「세일즈·맨」이던 이상태가 일행을 가로막고 나에게 「계약위반」이라고 고함치며 멱살을 잡고 덤빈 것이었다. 이상태는 계약위반으로 고소하겠다고 나왔고 혈기 방장하던 나는 『전속이라고 말만 해놓고 석 달이 되도록 돈 한푼안주니 가수는 흙 파먹고 사느냐』고 응수하여 싸움판을 벌인 끝에 일본으로 떠났었다.
이때는 일본에 한번가면 한 달에 신곡 2곡을 판매하는 것으로 잡아 12판을 취입 24곡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때에 부른 것이 독창으로는 「타향살이」였고 이난영과 합창으로 「바다의 행진곡」 「배 떠나간다」 「바다의 로맨스」등을 부른 것이었다.
이 「타향살이」는 「테스트」판에서부터 크게 「히트」, 「고복수의 상표」처럼 되었는데 당초에는 3절까지만 있었던 것이고 4절은 취입할 때 즉석에서 내가 지은 것이었다.
한창 녹음을 하는데 가사가 짧아 3절까지 불러도 3분 30초가 안돼 할 수없이 시간을 맞추기 위해 노래를 계속하게 되었던 것이었고 준비 없이 흥에 겨운 채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이라고 작사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 장세정, 박향림(고), 소봉희, 진수영, 서옥자 등 신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