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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계한 『타향살이』가수-고복수씨 62세로 별세

    우리나라 가요계의 증인이었던 고복수씨가 고혈압·식도염 등의 지병으로 약 3개월 동안 세브란스병원에 입원가료 중 10일 하오3시쯤 사망했다. 올해 62세. 고씨는 1910년 울산태생

    중앙일보

    1972.02.11 00:00

  • (346)>|가요계 이면사(26)|고복수

    가요계에는 멋쟁이가 많았다. 인기직업이고 보니 여자가 잘 따랐고 수입이 좋았으니 낭만도 많았다. 술 잘 마시기로는 이재호 이었다. 1940년께 황금정(지금의 을지로2가)의 황금여

    중앙일보

    1971.12.30 00:00

  • (344)|가요계 이면사(25)|고복수

    가요계는 제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조선 군 보도부의 강요로 전쟁 협력에 나서게 되어 치욕의 시대를 맞은 것이었다. 연예인들은 징용 나간 사람, 학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중앙일보

    1971.12.29 00:00

  • (343)|가요계 이면사(24)|고복수

    서민호가 빅터·레코드 연주단을 맡아 반도가극단으로 개편한 것은 1939년이었다. 이 반도가극단은 서민호를 단장으로 김도연(전 국회의원), 신윤국(일명 신현모), 김양수(증권거래소

    중앙일보

    1971.12.28 00:00

  • (342)|가요계 이면사(22)고복수

    레코드가 히트하고 가수들의 수입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가요계는 태평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 잃은 슬픔은 가요계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다. 노래는 두메산골이나 한적한 어촌이나를 가리

    중앙일보

    1971.12.25 00:00

  • (341) | 가요계 이면사( 21)|고복수

    한국의 가요는 「막간」에서 시작되어 레코드로 개화, 무대에서 열매맺는 것으로 성장했다. 가요 개화기에 노래를 키운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즉 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들이다. 처음

    중앙일보

    1971.12.24 00:00

  • 연예

    현존 가수 중 최고령자이며 우리 나라 가요사의 산 증인이기도한 고복수씨 (59)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태에 빠져있다. 평소 체질이 약한데다 고혈압과 식도염

    중앙일보

    1971.12.24 00:00

  • (335)-가요계 이면사(15)고복수

    백년 설은 가요계에 늦게 나왔으나 단시일 안에 인기의 좌에 올라 한 걸음 먼저 가요계에 나와 군림하던 가수들을 앞질렀다. 그는 풍류객이었고 한때는 문학에 뜻을 두기도 했다. 꽹과

    중앙일보

    1971.12.17 00:00

  • (334)||가요계 이면사(14)|고복수

    황금심이 「빅타」에 입사했을 무렵, 「빅타」는 가극단을 구성하여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배우·가수 등 20명의 구성 외에 악사 등 15명 안팎, 잡역 5, 6명 등 40여명의

    중앙일보

    1971.12.16 00:00

  • (333)가요계 이면사(13)|고복수

    내 아내이자 동료인 황금심이 가요계에 나온 것은 1935년이다. 본명은 황금동이고 16세때 「데뷔」했는데 열 서너살 될 때부터 내가 잘 아는 터였다. 황금심의 집은 지금의 청진동

    중앙일보

    1971.12.15 00:00

  • (332)제23화 가요계 이면사(12)

    김정구가 가수로 나온 것은 1934년이었다. 가요황금시기에 등장한 김정구는 처음부터 만요(코믹·송)를 불러 인기를 끌었는데 그는 「코믹·송」을 부른 탓으로 「제스처」의 새「스타일

    중앙일보

    1971.12.14 00:00

  • (331)가요계 전이면사(11)고복수(제자는 필자)

    초기의 가수들은 대개 학벌이 없었다. 다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목소리를 작곡가들이 일찍 알아주는 것이 가수 데뷔의 길이기도 했다. 1931년에 가요계에 등장한 남인수도 학벌이나 체

    중앙일보

    1971.12.13 00:00

  • (329)가요계 이면사(9)고복수

    이 무렵의 인기가수는「레코드」 회사에서 찾아내어 양성했거나 발굴하여 전속으로 삼고있었고 타사의 인기가수를 빼오는 것도「레코드」회사의 일의 하나였다. 「레코드」회사는 OK만이 한국

    중앙일보

    1971.12.10 00:00

  • (328)가요계 이면사-제23화「레코드」업계|고복수

    일본에서 「레코드」를 취입해 오던 시대에는 「레코드」의 판매경쟁이 볼만했다. 1920년에서 1930년대는 「레코드」가요의 전성기였고 따라서 모든 가요는 「레코드」로서 보급되었으니

    중앙일보

    1971.12.09 00:00

  • (327)제23화-가요계 이면사(7)|고복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요계는 요람기를 벗어나 황금시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배우이면서 노래를 부른 사람이 많았다. 강석연도 김연실 복혜숙 석금성 전옥 신

    중앙일보

    1971.12.08 00:00

  • (326)-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6)

    「콜럼비아」에 당선, 유행가수로서 「데뷔」했을 때 가수는 몇 사람 없었다. 채규엽 김용환 강홍식 최남용은 선배였고 최남용과 동년배로서 나보다 조금 빠르게 가요계에 나온 사람으로

    중앙일보

    1971.12.07 00:00

  • (325)-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5)

    내가 유행가수로서 「데뷔」한 것은 이같이 선배들이 웬만큼 길을 닦은 1929년 10월이었다. 이 무렵 우리 나라에는 일본의 「레코드」회사가 대거진출, 지점을 차리고 축음기와 「레

    중앙일보

    1971.12.06 00:00

  • (324)제23화 가요계 이면사(4)

    (하) 이 황성옛터의 노래는 만월대의 황폐한 것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망국의 설움을 달래기도 한 것이었다. 단성사에서 이 애리스의 목소리로 이 노래가 처음 불러졌을 때 관중들은 발을

    중앙일보

    1971.12.04 00:00

  • (323) 제23화 가요계 이면사(3)|고복수

    1920년대는 가요계의 요람기였다. 이때는 무대배우와 가수, 가수와 작곡가 등의 영역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뒤범벅이 되어 있을 때 였다. 학도가 등 가요가 있었으니, 이를 지은이

    중앙일보

    1971.12.03 00:00

  • (322)-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2)

    초기의 유행가는 「레코드」로서 보급되었다. 지금처럼 「라디오」나 TV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노래는 직접 극장에 가서 듣거나 아니면 「레코드」로 전파되었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중앙일보

    1971.12.02 00:00

  • (321)-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1)

    고복수씨는 1929년 콜럼비아·레코드 회사에서 주최한 전선가요 콩쿠르에서 1등 당선함으로써 가요계에 데뷔, 『타향살이』·『짝사랑』등 많은 인기 곡을 불렀다. 1955년 은퇴 후 동

    중앙일보

    1971.12.0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