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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제자는 필자|<제23화>가요계 이면사(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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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비극여왕 이경설>
「콜럼비아」에 당선, 유행가수로서 「데뷔」했을 때 가수는 몇 사람 없었다.
채규엽 김용환 강홍식 최남용은 선배였고 최남용과 동년배로서 나보다 조금 빠르게 가요계에 나온 사람으로 여류가수 이경설과 이애리수가 있었다.
1929년10월을 전후해서 유행가수로 나온 사람들로는 나와 같이 「콜럼비아·콩쿠르」에서 당선한 윤건영과 조금자 정일경 이외에 기생출신 가수 왕수복과 이은파 선우일선 등과 갓 출발한 김창선 이난영 등이 등장하여 차츰 유행가수들이 직업인으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명가수의 수는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
이경설은 청진출신이었다. 가요계에 나온 것은 7살 때로 기억되는데 원래는 신 무대의 비극배우였다.
박승희의 토월회에도 참가했었고 목소리가 고와서 가수로 「픽업」되었던 것인데 1919년의 3·1운동이후 밀려 닥친 북간도 등으로 이산하는 민족의 슬픔이 물씬 풍기는 노래를 불렀었다.
이경설의 「히트」곡은 「정한의 밤차」였다. 이규송 작사, 강윤석 작곡의 이 노래는 노래와 대사(가사)가 섞여있는 것이다.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가는 임이여』의 노래에 이어서 『님이여 가지마소, 당신 없는 세상은 회오리바람 부는 어두운 사막이외다, 그리고 「피라미드」가 떨린다는 모질고 사나운 눈물 같소이다. 차라리 가시려면 정을 두어 무엇하오 정 두고 몸만 가신다니 이 아니 서러운가요』하는 대사가 있었다.
여기서 「임」은 나라임이 분명하여 만주와 일본 등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부르며 울었던 노래였다. 이경설은 34년에 세상을 떴다.
이애리수도 배우였다. 개성태생으로 미모에 목소리가 좋았고 역시 토월회·신 무대 등에도 있었고 1929년에 변기종이 조선 연극좌를 세웠을 때 크게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다.
이애리수가 가수로 나온 것은 16살 때였다. 작곡가 전수인이 목소리를 듣고 『가수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청을 넣어 가수로서 키운 것이었다. 당시 토월회(1922년)에는 윤심덕도 있어 이애리수와 윤심덕은 잘 아는 사이였고 나이는 윤심덕보다 어렸다.
가수로서 부른 첫 노래는 「버리지 말아주세요」였다. 물론 전수인이 작곡한 것인데 크게 「히트」했었고 그 다음에 부른 것이 「황성옛터」였다.
「황성옛터」는 당시에 「빅타·레코드」의 문예부장을 하던 이기세가 전수인과 이애리수를 일본으로 보내 「레코드」취입을 주선했던 것으로 전수인-이애리수는 이때 「콤비」로서 일약 이름이 났다.
이애리수가 소속했던 조선 연극좌에는 당시 쟁쟁한 극작가와 배우들이 있었다. 박영호, 왕평, 임선규, 김건 등 간부진에 변기종, 성광현, 강홍식, 하지만, 문수일, 이종철, 신불출, 황철, 이경환, 양백명, 권일정, 전경희, 이복본, 박영태, 이백수, 이소연, 서일성, 송해천, 복혜숙, 전옥, 신은봉, 지경순, 지계순, 이영자, 문예봉, 이경설 등의 연기진이 있었는데 이 연극좌에서 가수로의 이애리수는 한결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1935년께의 일이지만 일본 「빅타」에서 이애리수를 초청, 일본노래 「아다 나사께」(미운정)를 취입한 일이 있었다.
이 노래는 문인이자 경응대 교수인 「사이죠」(서조팔십)가 작사한 것에 전수린이 작곡하여 이애리수가 부른 것으로 말하자면 한·일 합작이었고 크게「히트」했었다. 그때 나이 23세였다.
일본 「빅타」는 이애리수를 아껴 미국으로 보내 공부시켜 더욱 키워나갈 계획이 있었고 이기세가 이 계획을 적극 밀고있었으나 뜻하지 않게 사랑의 상처로 이 계획이 꺾여졌다.
인기가 한참 오를 무렵, 이애리수는 서울의 부잣집 아들 배동필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연희전문을 마친 배는 이애리수와 뜨거운 사랑 끝에 결혼하기로 맹세했지만 완고한 집안에서는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배의 부모들은 「광대」와 결혼하는 것은 가문을 두고 승낙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배는 이 사랑이 아니면 죽어버리겠다고 맞섰으나 어느 쪽도 누그러지지 않아 결국 배-이 두 사람은 정사를 기도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면도칼로 손목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했으나 다행히 죽지 않고 친지들에게 들킨 것이었다.
이것을 본 이기세는 『할 수 없다. 너희들끼리 좋다면 결혼할 수밖에 없지』하면서 배의 부모를 만나 그야말로 일대 담판 전을 벌인 끝에 노인들의 고집을 꺾어 결혼인가(?)를 얻어낸 것이었다.
이애리수는 결혼하자 곧 은퇴, 무대와 노래에서 떠났다. 지금 서울에 살고있다.
이애수리가 일본에서 「아다나사께」를 부를 때 공연장인 「히비야」공회당은 초만원을 이루고 하늘에는 대형 「애드벌룬」이 날렸고 「프로마이드」수백 만장이 비행기에서 뿌려지는 등 공전의 인기를 모았으나 일찍 은퇴해 주부의 길을 택한 것 이였다. <계속> 【고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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