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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제23화 가요계 이면사(3)|고복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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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20년대는 가요계의 요람기였다. 이때는 무대배우와 가수, 가수와 작곡가 등의 영역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뒤범벅이 되어 있을 때 였다.
학도가 등 가요가 있었으니, 이를 지은이가 있을 것은 분명한 것이다..
우리 나라 음악의 개척자는 김인식이었다. 이 사람은 가요작곡가는 아니었지만 개화기에 유명한 부모은덕가·학도가, 그리고 안창호가 평양 대성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킬 때 일종의 군가로 불렀던 노래 등을 작곡하여 널리 부르게 한 분이다.
이때의 훈련가는 제목은 없었고 가사가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 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 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목적 아닌가』하는 것으로 나라 잃은 청소년들에게 야망을 심어 주려는 뜻이 마디마디 사무치는 가사였다.
이 김인식에 이어 양악의 기초를 세운 분으로 이상준이 있었다. 이분은 1884년에 태어났으니 내가 가요계에 「데뷔」한 1929년에는 이미 40대였다.
초창기 음악계의 천재로서 15세인 1899년에 대성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으니 조숙하기로 기록적이었다.
이분은 그때에 이미 우리 나라의 가곡을 5선지에 채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내가 가수로 출발하던 1929년에 「눌령 방아타령」등 30곡을 묶어 「신선속곡집」을 내놓고 있었다.
이 속곡이라는 것은 민요와 가요를 가리키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 속곡집의 서문에는 『조선에는 위로 정악이 행해지고 아래로는 항간에서 부르는 속곡가요에까지 이르고 있고 명창과 묘곡이 적지 않다. 허나 오늘날 사회의 분수를 모르고 영하며 가하하며 요하는 자, 음설에 빠지지 아니하면 비애 울음에 기울어 미풍을 상하며 선속을 상하여 도리어 국민의 덕성을 해함이 적지 않다』고 나무라고 『그런고로 학교에 창가 과목을 두어 품격과 정서를 도야하고 있지만 양악이 들어온 지 오래지 않으므로 그 수준이 유치한 정도에 머무르고있다』면서 보다 자연적인 심정에서 우러나는 속가곡에서 인정과 천진난만한 감흥을 볼 수 있다고 하여 가요가 너무 슬픔에 치우치지만 않게 부른다면 좋은 것이라는 뜻을 비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요를 깊게 이해해주었던 것이다. 이분 뒤에 요즘의 가요에 일치하는 음악을 한 사람으로 정사인이 있었다.
이분은 학교작곡을 많이 했지만 1910년대에 「타향」이라는 가요를 작곡하여 크게 유행했다.
『내 고향을 이별하고 타향에 와서, 쓸쓸한 방 홀로 앉아서 생각을 하니, 답답한 마음 아- 누가 위로해.』하는 서정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이 곡이 현대 가요작곡의 최초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최초에 작곡된 몇 곡 중에 포함되고 있다.
이분은 이밖에도 「나가자 전쟁장으로」「내고향」「망향곡」등을 작곡했다.
정사인에 이어서는 가요작곡가가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가 오늘날의 가요, 즉 그 무렵에는 유행가 작곡의 요람기가 되는 것이다.
이 무렵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작곡가로 전수린·난파 홍영후가 있었고 이일상·전기현·형석기·김교성 등이 있다. 1920년대이다.
당시에 활약한 작곡가들의 음악을 공부한 경로는 다양했다. 「황성옛터」로 30년 이상의 장기 유행가 작곡자인 전수린씨는 11, 12세 때에 작곡공부를 했다.
개성출신인 전씨는 호시돈여학교 초대교장이던 「루츠」부인에게 사사했는데 14세 때에 이미 작곡을 시작했다.
당시 개성에는 중앙회관과 고려여자회관이 있었는데 여기에 「예뱃소년음악단」이 있어서 전씨는 여기서 음악공부를 한 것이었다. 미국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나라 잃은 슬픔을 잘 알고 있어서 한국인을 빨리 개화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유년교육을 서둘렀던 모양이었다. 「루츠」부인은 「바이얼린」을 잘했는데 전수린씨는 15세 때에 몇 개의 곡을 습작으로 내놓고 있었으며 천재라는 평을 받았다고 전씨가 유명한 「황성옛터」를 작곡한 것은 21세 때였다. 이 작곡에는 유래가 있었다. 1927년 여름이었다. 당시 전씨는 뒷날 가요계·흥행계의 중진이 되었던 왕평의 순회공연단에서 악사로 있었는데 황해도의 백천에서 비 때문에 공연을 못하고 여관방에 갇혀 있다가 문득 고향 개성의 만월대의 황폐한 모습이 떠올라 오선지에 선율을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가사는 없었다. 이 선율을 본 왕평이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하다가 곡에 맞춰 작사를 한 것이었다. 만들어놓고 보니 걸작이었다는 것이다. 왕평도 전수린도 한꺼번에 유명해졌다.
이 노래는 배우출신 미모의 가수였던 이「애리스」가 불렀다. 극단 취성좌가 벌인 공연에서 이「애리스」가 이 노래를 부르자 공연장인 단성사 안에서 관중이 떠들썩 소동이 나 경찰이 나왔고, 너무 슬픈 노래라하여 고등계 형사의 조사를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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