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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제23화 가요계 이면사(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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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초기의 작곡가>(하)
이 황성옛터의 노래는 만월대의 황폐한 것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망국의 설움을 달래기도 한 것이었다.
단성사에서 이 애리스의 목소리로 이 노래가 처음 불러졌을 때 관중들은 발을 쿵쿵거리고 의자를 부러뜨리고 온통 야단이 났었다. 상투장이 노인네가 많았는데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도 임검 경찰관이 있었는데 일본사람인 탓으로 일감정을 느끼지 못해 관중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가 한참 뒤에 뜻을 알고 당장에 작곡가 전수린을 경찰서 고등계로 불러갔다.
고등계에는 최해일이라는 왜경 앞잡이가 있었는데 경기도 경찰부에서 연예관계를 맡은 자로서 아주 악질이었다.
모든 우리 나라 연예인들은 한번쯤 이 자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것이다.
최는 전씨에게 『왜 슬픈 노래를 작곡하느냐』면서 『지금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데 그런 되지 못한 눈물 짜는 노래를 만드느냐』고 윽박질렀다.
전씨는 만월대가 황폐한 것을 보고 허무한 감회를 느꼈을 뿐 다른 뜻이 없고 이 노래는 슬픈 노래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최는 전씨를 「부령선인」(왜경들이 독립 운동하는 사람을 불렀던 말)으로 몰려고 했으나 증거가 없어서 풀어놓았다.
그 다음 왕평도 불려 갔으나 그럭저럭 무마되었다.
전씨보다 조금 앞서서 작곡하던 사람으로 김용환이 있었다. 김정구의 바로 형인데 아무든 고향인 원산에서 연주 생활을 하다가 「방랑자의 노래」를 작곡하고 부르고 한 사람이다.
1925년대인데 이때 원산에는 이흥렬씨가 와서 음악동호인들로 교향악단을 만들고 합창단도 꾸미고 있었다.
이흥렬씨(가곡 작곡가·예술원 회원)는 일본서 음악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있었는데 유행가와는 관계없지만 음악인들을 길렀고 김용환과 김정구 형제가 여기서 「바이얼린」을 배웠다. 성악가 김자경 이인범 이인영도 이 무렵에 원산에 있었다.
김용환이 작곡한 「방랑자의 노래」는 나라 잃은 슬픔을 읊은 것인데 가사가 퍽 처량했다.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움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누가 알거나』하는 것이었다.
김용환은 뒤에 민요가수로 이름을 떨친 이화자와 사랑에 빠진다.
이 무렵에 김영환은 호를 서정이라 하여 작곡활동을 했는데 『세 동무』 『암로』 등 많았다. 이 분은 한때 무성영화의 변사로 활약한 사람이었다.
무성영화 시대의 활동사진에는 낭만적인 일들이 많았다. 우선 변사가 있어야 했고, 효과음악을 반주반이 끼어 있었다.
영화는 대체로 서부활극, 일본 「사무라이」극이었는데 변사는 줄거리를 설명하고 반주반은 화면에 맞춰 격정의 순간에는 「템포」가 빠른 곡을, 낭만적인 「신」에서는 달콤한 선율을 연주해 주었다. 경영자 측에서 보면 불편했지만 관중 편에서 보면 요즘과 별로 다른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끔 순서가 잘못 되어 결투장면이 나오는데 감미로운 음악을 넣는 수가 있어 웃음을 사기도 했다.
지금 가요계의 대원로인 박시춘이 어렸을 때 무성영화연주단에서 일한 일이 있었다.
박시춘은 본명이 박순동이다. 밀양 태생인데 7세 때 소학교 운동회에서 스물 안팎의 청년들 틈에서 북을 멋들어지게 쳐서 신동이란 소리를 들은 음악의 재사였다.
14세 때 순천에 있는 친척집으로 양자를 갔는데 여기서 무성영화의 순읍대에 끼게 되었다.
순읍대란 무성영화 팀 중에서 정규 코스를 얻지 못해 수시로 사방을 떠돌이 하는 유랑 흥행단체였다.
이 순읍대가 가는 곳에는 전기도 없어서 개스로 조명을 하는 구식 영사기를 갖고 있었으나 반주반은 「피아노」 「바이얼린」 「트럼봉」등 5, 6개 악기를 갖춰 제법 화음이 되었다.
박시춘은 여기서 2∼3년 일하는 사이 각종 악기를 「마스터」했고, 그 뒤 마산∼진주∼통영을 다니는 정규 코스 영화 팀에 들어갔는데 이때는 이미 작곡을 하고 있었다.
17세 안팎에 만주까지 갔다가 일본으로 가 「고오베」에서 음악공부를 하여 「작곡에 박시춘」의 기틀을 닦은 것이었다.
첫 작품을 낸 것은 19세 때였다.
첫 곡은 『청춘야곡』이었고 두 번째 곡이 「운다고 내 사랑이 오리오마는」하는 『애수의 소야곡』이었다.
애수의 소야곡은 『눈물의 해협』이란 두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 남인수의 목소리로 더욱 빛나 크게 히트한 것이었다. 전·박씨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40년간의 작곡생활을 통해 각각 3천곡 안팎의 가요를 생산(?), 막상 막하의 기량을 보여 주고 있다.
1925∼30년의 무렵 작사에는 이부봉, 왕평, 문일석, 김준인, 이규송 등이 있었고 작곡에는 손목인, 강윤석, 문호월, 김준영, 이재호 등이 있었다.
반야월도 조금 늦게 가요 작곡계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는 본격이 박창오이고 이방남, 반야월 등 2개의 예명을 갖고 있었다. <계속><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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