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제23화>가요계 전이면사(11)고복수(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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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인수의 일생>
초기의 가수들은 대개 학벌이 없었다. 다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목소리를 작곡가들이 일찍 알아주는 것이 가수 데뷔의 길이기도 했다.
1931년에 가요계에 등장한 남인수도 학벌이나 체계 있는 음악 공부는 못했으나 타고 난 재질로써 가요계의 한 시기를 휩쓸고 지나갔다.
남인수는 진주사람이다. 본명이 강문수이다. 어렸을 때 일본에서 자랐고 15∼17세까지 동경근처 「사이다마껭」의 작은 전구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목소리만은 타고나서 전구 공장에서 일하면서 유명한 가수들의 노래를 익혀 친구들로부터 『명창이다』라는 칭찬을 받아 노래에는 처음부터 웬만큼 자신이 있었다.
남인수가 19세 때 귀국해서 가수를 희망한 끝에 처음 찾아간 곳이「시에릉·레코드」 회사였다. 「시에롱」은 지금 충무로 신도호텔 자리에 있었다.
「시에롱」의 문예부장 박영호는 남인수를 테스트해 보니 쓸만해서 박시춘이 작곡한 『눈물의 해협』이란 곡을 주었고 곧 레코드 취입하는 것으로 데뷔했다.
박시춘은 이때 OK에 있었는데 박영호는 남인수가 가수로서 크게 될 자질을 인정한 나머지 소갯장을 써주며 박시춘을 찾아가라고 했던 것이다.
남인수가 박시춘을 찾아갔을 때 그는 학생복인 「쓰메에리」를 입고 「게다」를 신고있었다.
이것이 박시춘-남인수 콤비의 첫 대면이었다.
박시춘이 남인수를 위해서 작곡해준 처음 노래는 『범벅서울』이라는 것이었고 노래가 좋아서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게 했던 것이었다.
『애수의 소야곡』과 『눈물의 해협』은 이 명동 곡이었다. 이 노래가 남인수의 목소리에 실리자 노래도 곡도 한꺼번에 살아나 두 번째 곡인 『물방아 사랑』을 취입하자 더꺼머리였던 남인수는 단번에 유명해진 것이었다.
처음『시에릉』에서 『눈물의 해협』이란 이름으로 취입했을 때는 주의를 일으키지 못했던 이 노래가 『애수의 소야곡』으로 이름만 바꾸어 취입하자 「OK 레코드」회사사장 최고 「히트」가 되어 선풍을 일으킨 것이다.
남인수는 여기서 단숨에 1년 먼저 OK에 입사한 이난영과 함께 OK의 중진가수가 되었다. 1938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당시의 유명하던 일본 여자배우「드드로끼·유끼꼬」와 합창으로 이『애수의 소야곡』을 일본곡명 『아이수노·세레나데』로 불러 전 일본을 휩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인기와는 달리 남인수는 평생을 고생스럽게 살아간 것이었다.
23세 때인가 OK 악극단에서 평양공연을 가서 금천 대좌에서 가극을 한일이 있었다. 이 무렵에는 가수도 연극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마침 남인수가 춘향전의 이도령역을 맡고있었다.
그런데 연극이 진행되어 어사 출도의 순간에 남인수가『어사 출도요-.』하며 무대에 나오다가 한가운데서 퍽 쓰러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관중들은 연기의 일부인가 했고 변 사또 역의 동료는 어리둥절했으나 곧 신병으로 쓰러진 것을 알고 연극은 난리가 나서 아우성 속에 막이 내려진 것이었다.
남인수는 각혈을 했고 진찰 결과 폐가 나쁘다는 판정이 내려진 것이었다.
그래서 남인수는 곧 쉬면서 병을 치료했으나 병이 나을 만 하면 또 무대에 서고 병이 도지면 또 쉬는 것을 되풀이해왔다.
그러나 무대에 서기만 하면 그는 다른 가수보다 더 많은 박수와 재창을 받았고 이 때문에 남인수는 끝내 무대를 떠나지 못했다.
노래를 몇 곡 부르면 병이 도지는 것을 아는 남인수는 자연히 병에 쓰러졌을 때를 생각하여 구두쇠가 되었는데 일단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다시 나오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남인수에게는 처음 「돈인수」라는 별명이 붙었다가 나중에는「쐬 인수」로 불렀다.
그는 조선악극단을 따라 북만주 등을 돌면서 『꼬집힌 풋사랑』 『물방아 사랑』『낙화유수』등을 불러 인기를 끌었는데 모두 박시춘 작곡이어서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해방 후에는 유명한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남겼다. 남인수는25세 때 무용가 김운화와 결혼했었으나 해방 후 이혼했다. 그에게는 숱한 여인이 뒤따랐다. 62년에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는「산홍」이라고 쓰인 작은 조화가 많은 조화 속에 끼어 있었다. 그리고 「산홍」이란 조화의 주인공도 장례식장에 와있었다.
산홍은 남인수가『꼬집힌 풋사랑』을 처음 불렀을 때 19세 된 동기였다는 것.
이 노래를 듣고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했다가 미수에 그쳤고 이 사실을 알게된 남인수가 병문안 찾아간 것이 인연이 돼 순정을 바쳤던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인수는 김해송 없는 이난영과 동거하고 있던 때여서「산홍」은 끝내 멀리서 장송한 것으로 이별을 고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남인수는 1931년부터 1962년까지 사이에 해방 전 8백곡·해방 후 2백 곡을 취입, 최고의 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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