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현지 르포] "걸프전 후 하루하루가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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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앞으로의 전쟁은 큰 의미가 없다. 이미 지난 12년간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아왔다." 요르단 수도 암만 시내 한복판에서 대추야자를 파는 이라크 노인 술라이만 알나시리(56).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교사로 지내던 그는 1991년 걸프전을 피해 요르단에 왔다.

"대추야자를 팔아 3개월 동안 열심히 돈을 모으면 바스라에 있는 가족이 3개월 동안 먹고 살 수 있다." 알나시리는 3개월마다 이라크로 돌아가 다시 비자를 받고 요르단으로 돌아오는 힘든 삶을 계속하고 있다.

걸프전 이후 요르단과 이라크 경제는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이라크는 석유를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값으로 요르단에 공급하고, 요르단은 이라크가 필요로 하는 생필품의 대부분을 제공하고 있다.

요르단 주재 이라크대사관 공보관인 자와드 알알리(46)는 "한 사람이 출입국을 반복하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30만명 이상이 요르단에서 생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르단에 사는 대다수 이라크인에게 삶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암만 도심의 길거리에서는 담배.휴지.장신구 등을 파는 이라크 여인들이 쉽게 눈에 띈다.

유수프(39)와 자브리(43)는 이라크 남부 출신의 시아파 무슬림들로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다. 생계를 위해 그들은 아이들을 고향에 두고 이곳에서 담배(대부분 밀수품)와 휴지를 팔고 있다.

그들은 "아이들 공부 때문에 떨어져 지낸다"면서 "하루 빨리 이 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이들도 전쟁의 피해자다. 로마 원형경기장 유적 주변 공원에서 차를 팔고 있는 아킬(14)은 형과 함께 이곳에 왔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있는 바스라로 인편을 통해 돈을 부치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금요일마다 장이 서는 라가단 시장에서 옛날 동전을 팔고 있는 왈리드(10)는 "아버지가 비자 문제로 귀국해 당분간 내가 노점을 맡고 있다"며 몇 푼 안되는 수입을 보여준다.

서정민 중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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