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제22회 부산통화개혁(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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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난산 부대인쇄물>
구 화폐단위가 「원」이었고 또 새 돈에도 한글로 「원」이라고 찍힌 이상 한자로도 당연히 「원」을 썼어야 할 것이었다. 도안을 우리 나라에서 해갔다면 도안한 사람이 원과 원의 구별을 못했을 리가 없다.
이 문제에 관련해서 이조말기의 화폐단위 「환」을 연상할 수 있다. 고노들이 흔히 「환」이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조 때의 「환」이 「환」인지 「원」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이 새 돈으로 화폐 계획을 했고 국민들은 대통령긴급명령에 따라 「원」과 「원」이 동시에 표기된 화폐단위를 「환」으로 고쳐 부르게 됐었다.
돌이켜보면 미군이 인쇄해온 그 돈은 한은 금고에 보관해 둔 채 6·25피난 때 부산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은행직원들은 미군이 맡겨놓은 인쇄물이라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행원들은 그것을 「아이스캔디·박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돈 상자는 가로 60㎝, 세로와 높이 각 30㎝의 나무궤짝이었고 돈을 담은 무게는 30㎏정도였다. 상자마다 자동폐쇄장치가 돼있어 화폐교환 후에는 은행서류함으로 쓰기도 했고 행원들이 집에 가져가서 가구대용으로도 사용했다.
9·28수복 때 와보니 돈 상자는 하나도 다치지 않고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부산으로 가져간 것은 1·4후퇴 때며 부산서 보관할 장소를 못 구해 한참 애를 먹었다. 그때 마침 조선방직창고가 비어있고 보관시설도 괜찮아서 거기에다 맡기고 경찰에 엄중한 경비를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새 지폐는 확보돼 있었지만 통화 개혁에 따른 부대 인쇄물을 찍어내는 것이 큰 문제였다. 우선 국내에서 인쇄를 할 경우 잠깐 사이에 될 것도 아닌데 비밀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의 문제가 있었다.
이상덕 조사부장은 적당한 인쇄소를 물색하기 위해 부산시내를 샅샅이 뒤진 후 귀포까지도 가 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다고 했다.
그때의 인쇄소시설은 요즘 같은 고속윤전기가 없어 공정이 상당히 느린 것이었다.
이 조사부장은 이 같은 인쇄공정, 필요한 인쇄물의 양, 실시일자 등을 고려해서 정확히 며칠 전부터 인쇄를 시작해야 「카운트·다운」이 딱 맞아떨어질 것인가를 정확히 계산하고있었다.
장소가 괜찮은 곳은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 시설이 미흡했다. 그래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인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신문사도 한때 고려해보았는데 운전실을 완전봉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
나는 백 재무장관과 상의한 결과 미국이나 일본에서 인쇄를 해올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대통령 재가를 얻기 위해 백 장관과 함께 경무대로 들어갔다.
이 대통령은 백 장관의 해외인쇄얘기를 들은 후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임철호 비서관(전 국회부의장)을 불러 『속사판 있지? 그것 좀 가져와』했다. 임 비서관이 갖고 들어온 것은 바로 등사판이었다. 이 대통령은 등사판을 속사판이라고 불렀었다.
『안전한 장소가 없으면 이걸 갖고 내방에서 만들라.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 테니…』라는 이 대통령 말에 백 장관과 나는 어이가 없어 『다시 연구해 보겠습니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 나왔다. 백 장관과 다시 숙의한 결과 동래에 있는 조폐공사공장을 쓰기로 결정했다. 통화개혁발표를 나흘 앞둔 2월11일 백 장관, 나, 이 조사부장 세 사람은 조폐공사에 가서 나정호 사장을 만났다.
백 장관은 대뜸 왼쪽 가슴에 차고 있던 육혈포를 꺼내 나 사장 책상 위에 얹어 놓은 다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것이다. 이 시간부터 이상덕 한은 조사부장이 시키는 대로 긴급통화조치용 인쇄물작업을 시작하라. 이 사실이 누설되면 우리 모두의 모가지는 하루아침에 날아간다』고 엄숙히 지시했다. 곧 조폐공사간부들을 사장실로 불러들여 이 조사부장이 상세한 인쇄계획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 셋이 사장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조폐공사에는 일체의 출입이 차단됐다. 육군헌병 50여명이 조폐공사를 완전히 둘러싸 버렸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조폐공사에 큰 부정사건이 있어 조사중』이라고 위장했다. 이 시간부터 조폐공사는 4일간의 비상 철야작업을 시작했다. 거기서 인쇄한 것은 대통령담화문, 공고문, 화폐교환신고 용지 등 일반대중에게 배포할 많은 양의 인쇄물이었다.
그밖에 정부 관계 요로와 국회의원들에게 돌릴 법령과 해설, 실제 교환업무에 종사할 금융기관직원들을 위한 교환실시요령 등도 모두 여기서 인쇄됐다. <계속>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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