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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에세이] 사케가 밀린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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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지난해 7월 아내와 나는 죽마지우인 피죤의 이윤재(李允宰) 회장 부부와 함께 강남의 K일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모처럼 '쓰루가메(鶴龜)'라는 좋은 니혼슈(日本酒)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우리 넷은 생선회를 비롯해 담백한 일본 음식을 안주 삼아 1.8ℓ짜리 술 한 병을 모두 비웠다. 이른바 대음양주(大吟釀酒)라고 분류되는 그날의 사케(酒)가 뿜어낸 은근한 향과 섬세한 맛이 우리를 그토록 매혹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청주라 일컫는 술을 일본에서는 사케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일본에선 사케 제조에 정성을 쏟아왔기에 여러 지방에서 좋은 사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사케의 양조 과정을 보면 먼저 누룩이 쌀의 전분을 당(糖)으로 변환시키고, 이 당을 효모가 알코올로 바꾸는데, 이때 물과 쌀의 성질이 술의 맛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의 경연(硬軟) 정도와 쌀의 정미도, 그리고 발효과정의 온도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좋은 사케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화이트 와인을 제조할 때 저온 숙성이 중요한 것처럼 일본의 음양주도 저온으로 천천히 숙성시키는 것이 요체라고 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는 동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건강에 좋다는 이유 때문에 일본 음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스시(초밥)와 사케는 아예 영어 어휘에 파생될 정도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유행을 따라 미국에서 사케의 수요가 점점 증가하더니 마침내 미국 내에서 생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스시가 현재까지도 인기를 모으는 것과 달리 사케의 유행은 일찌감치 멈칫한 듯하다. 사케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미국 내 일본 음식점에서 캘리포니아산 화이트 와인에게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음식에 가장 잘 맞도록 발달돼온 사케가 왜 미국인들에겐 경원시되는지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식(食)문화의 차이인 것 같다.

미국인들은 날생선을 먹은 역사가 짧아서인지 담백하고 향내가 억제되어 있는 사케보다는 화려하고 향내가 강한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는 쪽을 선호하는 것이다.

화이트 와인에 비해 사케는 산도(酸度)가 아주 낮고 당도(糖度)는 높은 술이다. 그래서 맛이 담백하다지만 아무래도 단맛이 있고 향내가 약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동양적인 미묘한 맛을 미국인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게 또 다른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알코올 도수의 높낮이도 관계가 있는 듯하다. 사케의 알코올 도수는 약 17도다. 이에 비해 화이트 와인은 평균 12도이고, 모젤 와인의 경우는 8도 내외인 것도 많아 식사에 곁들이기에 사케보다 부담이 덜하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다. 보편적인 화이트 와인에 비해 차갑게 마시는 일본의 음양주가 훨씬 비싸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일본 요리에까지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마시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 자신도 생선회나 초밥을 먹을 때 가끔은 산뜻한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기를 좋아한다.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자면 루아르 지방의 상세르(Sancerre), 뮈스카데(Muscade) 그리고 이탈리아의 오르비에토(Orvieto), 소아베(Soave) 등이 값도 저렴하고 일본 음식과 조화도 잘 된다고 생각한다.

김명호 한국은행 전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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