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유엔」군의 총퇴각(11)|「6·25」 21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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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예기 안 했던 현지사령관 발령>
「지프」사고로 사망한 미8군사령관 「워튼·워커」장군 후임에는 미 육군 참모차장 「매듀·B·리지웨이」 중장이 임명되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2차 대전 때 「유럽」에서 미 공정사단장과 군단장으로 활약한 지와 용을 겸비한 명장이었다. 그는 육군 참모차장이란 직책상 한국 전쟁에는 처음부터 깊이 관여했지만 현지군사령관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일단 보임을 받자 즉시 한국으로 비래하여 「후퇴병」에 걸린 8군 장병의 사기를 돋워 중공군의 남침을 저지했다. 「워싱턴」은 전세여하에 따라서는 한국포기까지도 생각했던 만큼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과 세계의 운명을 바꿔놓았다고 할 수 있다.
장군의 저서 「한국전쟁」(Korean War)에는 그가 8군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에 부임,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기까지의 경위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다음은 그 부분에서 간추린 것(주=장군은 포항 미 육군 기념 농장 관리인 이종만씨를 통하여 본사에서 자기 저서를 인용 게재하는 것을 기꺼이 응낙한다고 알려왔다).

<나는 마치 총알이 갑자기 날아오듯이 한국전쟁에 직접 관여하게 되었다. 22일 저녁(「워싱턴」 시간)에 친구 집에 초대되어 저녁을 먹고 잡담을 하고 있는데 육군참모총장 「로튼·콜린즈」 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워튼·워커」 장군이 차 사고로 순직했으며 그 후임에 내가 임명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즉각 부임해야한다는 이야기였다.< p>

<설득력 강한 맥아더 원수>
나는 아내를 데리고 잠자코 친구 집을 나왔다. 아내는 늘 하듯이 내가 먼저 「콜린즈」 참모종장의 전화내용을 말하기를 기다렸으나, 밤새 너무 걱정할까봐 내일 아침에 알리기로 하였다. 이날 밤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꼭 먼저 해야할 일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워커」 장군부인에게 문상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이것을 하지 않고서는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8군사령관에 취임할 수 없는 것이다. 부리나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내가 동경우전 비행장에 내린 것은 12월 25일 자정이었다. 시차로 「워싱턴」은 아직도 성탄 아침일거라는 생각이 들어 PX에서 아내에게 선물을 사 부쳤다.
이제 미국본토에 대한 모든 일치레는 다 끝났다는 생각과 함께 진도 해협 건너 쪽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든 하고 말겠다는 투지가 생겼다. 이튿날 상오 9시반부터 「맥아더」 원수와의 회담이 시작되었다. 동석 자는 「맥」 사령부 참모부장 「도일·히키」 소장뿐이었다. 나는 회담벽두부터 원수의 극적인 자세에 주의가 집중되었다. 물론 나는 원수가 육군교관으로 있을 때부터 그를 알고 있지만 이렇게 무릎을 맞대고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우선 그의 의젓한 품격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어조나 몸짓이 본질적으로 연극의 본능을 지닌 위대한 배우이기도 했지만 상대를 압도하는 것은 원수의 몸매나 태도보다는 어떤 사태에 대한 그의 투철한 분석과 설득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맥아더」와 나는 한국사태를 자세히 검토 분석했다. 내가 「워커」 후임이 되기 얼마 전에 「맥아더」는 본국 육군성에 미8군은 축자적으로 부산지역까지 철수하겠다고 알렸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원수는 날더러 지탱할 수 있는 한 가능한 많은 남한지역을 확보하라고 말했다. 그리고도 주로 심리적 및 정치적 이유라면서 서울도 될 수 있는데까지 오래 방어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원수는 우리가 현재 정책의 진공상태에서 싸우고 있는 실정이며 군사행동이 성공하면 우리 외교도 강화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는 또한 중공남부 현재 허술한데 국부군으로 거기를 공격하면 한국의 미군에 대한 중압은 훨씬 완화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그 점을 건의했는데 「워싱턴」에서 거부했다고 말하였다.

<8군은 당신 것, 소신대로>
다음에 원수는 중공군 전투력을 소상히 평가한 후 다음과 같이 그의 견해를 결론지었다.
『나의 현재 목표는 남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적에 큰 타격을 주려는 것이오. 당신 자신의 견해를 종합해서 당신이 판단하도록 하시오. 나는 당신을 지지하며 전적으로 믿겠소.』
이제 내가 원수에게 몇 가지 질문할 차례였지만 사실 내가 묻고 싶은 점은 이미 대부분 언급된 셈이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나는 앞으로 소련이 참전할 경우 미8군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몇 달이 걸리더라도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겠다는 대답이었다. 나의 제2문은 적이 남한 깊숙이 남하하여 한국정부가 자양할 위험이 있을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위험은 없다고 말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나름대로의 정세판단에 따라서 8군이 정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때 이런 공격작전을 반대치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질문에 대한 원수의 대답은 가장 고무적이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미 제8군은 당신 것이오. 당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이것으로 「맥아더」와의 회담은 마치고 사령부 각 참모들로부터 한국전황에 관한 전반적인 「브리핑」을 들었다. 그리고는 12월26일 하오 4시에 대구에 도착하여 미8군의 지휘권을 잡았다.
나는 즉시 일선을 시찰하고 후퇴하는 8군이 공세를 재개하려면 얼마나 시일이 걸리며 무엇이 필요한가를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동맹군인 한국군에 우리가 한국을 혼자 내버려두고 철수치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군이 완전 철수한다고 한국인들이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적 치하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려고 「변절」을 마음에 둔다한들 이를 나무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남한이 피바다가 될 것도 분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승만대통령과 「무초」 대사를 즉시 예방하고 이 문제를 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 철군에 한국측 반응 미묘>
먼저 「무초」 대사를 만났더니 아니나 다를까 한국 관사들이 미군 철수에 대해 미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이대통령을 만났을 때에는 내가 미8군을 일본으로 데려가려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예상한대로 이대통령은 별로 반가와 하지도 않는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내 밀면서 의례적인 말은 다 걷어치우고 가슴속으로부터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 저는 한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머무르려고 여기 온 것입니다.』
이대통령은 나로부터 이 마지막 한마디, 즉 『한국에 머무른다』는 말을 기다렸던 것이 분명했다. 이내 굳었던 노안이 활짝 펴지고 눈물이 어리며 두 손으로 내 손을 힘차게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프란체스카」 부인에게 나를 소개하고 차를 내놓았다. 나는 차를 마시면서도 우리는 한반도에서 축출되지 않으며 8군은 태세를 재정비하는 대로 공세를 재개할 결심이라는 것을 이대통령에게 다짐했다.>
◇주요일지(1951년 2월4·5·6일)
※2월4일 ▲미·불군, 지평 탈환 ▲국군, 수원 서북방 6마일의 383고지 탈환 ▲미8군, 「유엔」군의 진격 38선 정지설 부인 ▲일, 공산당 8백79명 검거
※2월5일 ▲미 「탱크」대, 서울 남방 5리 진출 ▲「리지웨이」 장군, 8군 공세 순조롭다고 언명 ▲이대통령, 38선은 이미 없다고 언명
※2월6일 ▲「리지웨이」 장군, 피아 손해비율 1백대1이라고 발표 ▲미, 첫 수폭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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