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 용어로 첫 진통-백림협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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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7개월 동안의 끈길긴 협상 끝에 미·영·불·소 4대국간에 매듭지은 「베를린」협정이 정작 시행 세칙 마련을 위한 동서독회담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말썽의 씨는 영·불·노어로 돼 있는 협정문안의 독어 번역문안 중의 단 한가지 표현. 동서독 양측이 각기 다른 번역 문구를 들고 나와 두 당자간의 첫걸음부터 비틀거리고 있다.
양측의 번역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서독이 영어 텍스트를 사용, 원본대로 하자는데 비해 동독측은 노어 텍스트를 사용한 독어역을 고집하고 있다.
애초에 지난달 23일 협정문 초안을 마련해 놓고도 열흘 가량 4대국 대사가 서명하지 못한 것도 독어역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었던 것. 이 독어역을 놓고 양독이 시행 세칙을 위해 협상하게 되고 또 이 협상이 이루어져야만 「베를린」협정이 정식 발효되기 때문이다.
문제의 구절은 바로 서 「베를린」과 서독간의 왕래에 관한 대목. 서독과 서 「베를린」 간의 왕래를 규정한 조항 중의 통행(transit traffic)이라는 문구를 서독측은 수시로 왕래할 수 있다는 뜻으로 독어의 통행(Durchgangsverkehr)으로 번역한데 비해 동독측은 단순한 통과(transit)의 뜻만 지닌 독어의 경유(Durchgang)로 고집하고 있다.
사실 통과라는 뜻을 지닌 transit은 외국인이 타국을 경유, 외국으로 여행할 때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를 「베를린」협정에 적용할 경우 해석에 따라서는 서독과 서 「베를린」이 전혀 별개의 외국이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서독측은 동독이 이 문구를 빌미로 다시 「베를린」 통행에 제한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더우기 소련측도 협정 원문의 의미가 통행(Durchgangsverkehr)이 아니라고 동독측을 두둔하고 있어 서독의 의혹을 짙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서독측이 주장하는 독어역본은 4대국이 10여일간 난항 끝에 채택한 공식 독어역본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서독측의 주장이 관철될 것으로 보인다.
소련이나 동독측으로서는 이 문제가 타결돼야 지난해 체결된 독소조약이 서독의회에서 추진되고 이에 따라 양독회담이 진전돼야 동서독이 함께 유엔에 진출할 수 있는 협정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소련이 꾀하고 있는 유럽에서의 현상 유지를 위한 『구주안보회의』의 길을 터놓게 되는 것은 물론 구주안보회의에 필연적으로 동독이 참가, 사실상 서구제국으로부터 동독의 국가적 승인을 받아내는 셈이 되는 것이다. <김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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