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제자는 필자|<제18화>명창주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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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명창>후진 명창을 많이 배출하고 우리나라 고유의 창악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고 할 수 있는 세칭 8명창에 대해서는 몇몇 사람들의 소견이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적인 감정 같은 것이 조금쯤 작용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이를테면 명창 신재효 (전북 고창)가 그의 광대가에서 명창을 열거했을 때 주로 호남지방에서만 널리 알려진 명창들만 지적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후대 명창들에 의해 지칭된 8명창은 대체로 권삼득 송흥록 김계철 고수관 모흥갑 방만춘 염계달 신만섭 등이다. 소위 양반가문출신의 권삼득이 명창이라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 겪어야 했던 모진 아픔은 앞서 잠깐 소개한바있지만 나머지 7명창이 비록 미천한 가문 출신 이었다해도 이들이 겪었던 갖가지 어려움도 권삼득 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서 특히 많은 이야기를 남긴 이는 순조∼철종 간의 인물로서 전북 운봉 출신인 송흥록이다. 그의 동생인 송광록, 송광록의 아들인 송우룡, 송우룡의 아들인 송만갑이 모두 당대의 명창이었고 그의 매부인 김성옥이 진양조의 효시를 이루어 말하자면 송흥록은 창악일가인 송문의 우두머리인 셈이다.
예술을 하는 이들은 이성을 좋아한다든가. 송흥록은 여자를 무척 사랑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명창에 이르는 더딤 돌이 돼 주었다. 청년시절. 그가 한창 이름을 날릴 때 어느날 그는 새로 부임해온 경상감사의 부름을 받아 그의 앞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다. 그가 소리를 시작하면서 문득 동헌을 올려다보니 감사 곁에는 아주 어여쁜 기생이 앉아 있었다. 그 기생은 맹렬이라는 수청기생이었는데 굉장한 아름다움으로 해서 세상남자들에게는 선망의 적이 되었었다.
송흥록은 맹렬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불같이 일어 노래로써 맹렬의 마음을 사로잡겠다고 생각하고 목청을 가다듬어 정성껏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맹렬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녀는 듣는둥 마는둥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송흥록은 다음날 맹렬의 집을 찾아갔다. 맹렬은 송흥록을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자네 소릴 들으니 안되겠더구먼. 목에서 피를 토하지 못한 것 같아』하며 매정하게 외면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송흥록은 한마디 해보지도 못하고 쫓겨 나와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번민 끝에 노래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폭포를 찾아 목에서 핏덩이가 터져 나올 때까지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창에 도가 통하게 되자 송흥록은 즉시 경상감영으로 찾아가 감사와 맹렬 앞에서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때서야 맹렬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감사도 덩달아 찬탄하는 것이었다.
송흥록은 노래를 마치고 그동안의 이야기를 감사에게 드린 뒤 맹렬과 같이 사는 것을 허락해 주십사 부탁했다. 감사도 송흥록의 뜻을 가상히 여겨서 이를 허락, 명창과 일류기생은 그날로 동거에 들어갔다.
송흥록과 맹렬은 그후에도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송 흥록의 매부며 역시 명창인 김성옥이 이 부부의 안부를 묻는 것을 창으로 했는데 그것이 진양조의 시초였다는 이야기. 송흥록이 진주병사의 부름을 받고 진주로 갔는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맹렬도 진주로 가서 진주병사의 수청기생이 되어 송흥록을 골탕 먹였다는 이야기. 불화로 헤어지게 돼 맹렬이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나서자 송흥록은 섭섭한 감정을 차마 말로는 못하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하도 절묘하여 맹렬이 되돌아 왔다는 이야기….
송흥록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염계달도 10년 동안 계속했던 노래공부를 백지화하고 새로 노래공부를 시작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소년시절에 창을 배우기 위해 심산유곡에 있는 절에 들어갔는데 가는 도중 길에서 우연히 『장끼전』 책을 주워 『장끼전』만 가지고 10년을 하루 같이 익혔다. 10년 후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하산하여 세상사람들 앞에서 그의 창을 선보였으나 별로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다시 절로 돌아가 한동안 공부에 열중하던 염계달은 어느날 자기신세가 하도 한심하여 『에라, 소리나 마음껏 질러보고 죽자』는 생각에 절 기둥을 끌어안고 마음껏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서야 목청이 터져 피가 나오면서 염계달은 기절했다.
8명창가운데 가장 실감나게 노래 불렀던 사람은 송흥록과 같은 연대에 활약했던 방만춘이 아니었나 싶다. 충남 해미 출신인 그는 적벽가에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노래가 하도 실감이 나서 듣는 사람들은 모두 무서워서 벌벌 떨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땐가 방만춘은 큰절에서 수백 명의 관중들을 모아놓고 그의 장기중의 장기인 적벽가 속의 화전장면을 불렀는데 노래가 절정에 이르자 때는 서늘한 가을이었는데도 거의 모든 관중이 『덥다』면서 옷을 벗어버렸다는 거짓말 같은 실화를 남겼다. <계속> 【박헌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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