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권좌복귀 완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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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공은 25일 사천·흑룡강성과 티베트·영하회족 자치구의 공산당위원회결성을 무더기로 발표, 이로써 29개(21성·5자치구·3직할시)의 지방공산당조직을 모두 재건했다고 밝혔다.
문 혁 기간 중 소위 삼결합세력(혁명위원회)에 의해 와해되었던 당 조직이 6년여의 사실상 공백 끝에 자리를 잡은 셈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두개의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혁명 위와 공산당간의 두 번 째 자리바꿈 가능성과 인민대표자대회의 개최가 아주 임박한 것이 아닌가하는 점이 그것이다.
혁명 위와 공산당간의 첫 번째 자리바꿈은 67년 여름부터 시작된 탈 권 투쟁 때 있었다. 모·임 파는 실권파가 주도권을 쥐고있는 당 대신 혁명대중·군·혁명(당) 간부로 혁명 위를 만들어 모든 권한을 옮겨버린 것이다. 혁명 위는 그 뒤 모·임「롤·백」작전의 전위구실을 하면서 종래의 당 기능을 수행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 지방 당 위원회가 결성된 것은 70년 12월.
일본의 스가누마 교수가 호남성공당위결성을 전한 때부터였다. 말하자면 당위의 첫 결성이 있은 지 1년 9개월만에 모든 작업이 완결된 것이다.
따라서 혁명 위와 새로 재건된 공 당위간에는 어느 쪽이「지도적 입장」을 차지하느냐가 문제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공 당위의 발생과정과 소위 신 헌법초안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공 당위의 재건을 서두른 것은 주로「적대 회 분자」(모택동 사상 활 학 활용 적극분자대회)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방당위의 재건이 철저한 모 주의자들로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혁명 위와「동질성」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당 9기2중전 회(70·8·23)에서 승인된 신 헌법초안은 혁명 위를 인민대표대회의「상설기구」로 하는 한편(22조)인민대표대회는『공산당의 지도하에 둔다』(16조)고 규정, 공 당의 지도적 입장을 명백히 못박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혁명 위 권한이 공 당에 옮겨지고 이들의 동질성에 비춰볼 때 새로운 탈 권 투쟁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하겠다.
한편「업저버」들은 지방 공 당위의 조직완료가 인민대표대회의 임박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해마다 열기로 되어있는 인대(국회에 해당)는 65년1월의 3기 대회이래 6년 이상 공백상태로 있었다.
공 당이 완전히 재건된 지금 중공지도층이 가장 서둘러야 할 것은 인대의 개최라 할 수 있다. 신 헌법의 채택을 위해서도 그렇고 문화혁명을 완결하기 위해서도 인대의 개최는 필수불가결인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닉슨 방문 때의 모택동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인대의 조기소집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10월1일(정부수립기념일) 설이 맞든 안 맞든 간에 인대의 소집은 이제눈앞에 다가온 것 같다. 헌법채택, 올해부터 이미 시작된 제4차 5개년 계획의 승인 등 인대가 해야할 일이 모두 서둘러야할 성질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대의 조기개최 설에는 약간의 이론도 없지 않다.
공산당의 재조직완비로 문 혁의 상처가 인대에만 남게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실이 조기개최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공산당의 지방조직완비는 인대의 개최에 관계없이 문 혁의 완결을 뜻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문화혁명을『정치·경제혁명의 이데올로기에의 반영』(신민주주의론)으로 규정한 모택동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홍사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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