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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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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씨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의 선배이다. 내가 그를 직접 대하게 된 것은 졸업하고 귀국한 1923년 중앙학교서였지만 동경유학시절에도 종종 소식을 들었다.
내가 동경에 있을 때 그는 이미 한 사람의 학가로서 미술단체「서화협회」를 조직하고 1921년에는 협회전을 개최하는 등 이땅의 미술운동에 점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체 자체도 한국인 최초의 것이요, 공개를 위한 전시회는 도대체 전례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 소식은 동경에까지 굉장한 화제로서 들려왔다.
춘곡은 한국인으로서 처음 서양학을 배운사람이다. 구한국말에 일찍 개학한 가정에 태어난 그는 법어학교(법어는「프랑스」어)를 나와 궁내부주사로 있었고, 국운이 기우는 것을 스스로 겪자 서화를 익히며 비극적인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었다. 물론 안중식 조석진씨등 당시 동양화대가들한테 지도받는 것이었다.
이무렵 이땅에는 외국인에 의해 서양화가 조금씩 소개되고있었다. 소급해보면 한말에 철도기사로 초청돼온 「프랑스」인「아마추어」화가 「레미옹」이 있고 또 「네덜란드」인 「보스」도 있다. 춘곡은 「레미옹」이 인물「스케치」하는 것을 직접 본일이 있다고 한다. 또 법어학교선생인「프랑스」인 「마텔」(馬太乙)의 자극도 적지않이 받았던 것 같다.
한일합방 전후해서는 서울에 와 정착하거나 빈번히 왕래하며 작품을 가진 일본인 화가도 몇몇 있었다. 개중에는 구미유학의 경력을 가진 학자도 있고 양화연구소를 가설 (1911년)한 일본인화가도 있다.
동경미술학교출신으로 덕수궁내알전의 송학도벽화틀 그린바 있는 천초신내는 1902년부터 약 15년한 남산기슭에 살고 있었고 안중근태안은 순종의 어진 (1912년) 을 제작한 작가이다.
이같은 신문학의 자극을 받은 춘곡은 1909년 즉 환세에 서양그림을 공부할 결심을 하고 도일했다.그리고 5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19l5년에 귀국했는데,그의 졸업은 곧 한국인 최초의 서양학가 탄생이라는 점에서 국내의 떠들썩한 이목을 모았다.
1915년3월 매일신보 사회면에는 춘곡의 졸업에 대하여 『서양화가의 효시』란 표제하에 작품 『자매』 의 사진과 더불어 「톱」기사로 취급했었음을 보면 당시 얼마나「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나를 가히 짐작할 만 하다.
그 그림은 한복의 두 처녀를 소재로 한 유화이다. 그 작품이 오늘날 전하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신문사진으로 보아 대개의 윤곽이 파악된다. 서양식 「커튼」이 왼편으로 매어있는 창가에 머리를 길게 따 늘이고 치마저고리를 입은 두처녀가「클로스업」돼있다. 배경에는 대문과 담장등 상류층 가정의 내정이 엿보인다.
신문 사진으로 어떻다 말하긴 어려우나 비교적 대담한 필치가 보이며 명암처리에 있어 양학의 분위기가 잘 갖추어져있다. 미숙한대로 당시 서양화를 제대로 공부한 유화학도의 작품으로 손색없는 것이다. 어쨌든 매일신보의 지보기사에는 다소 흥분섞인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이 두 처녀의 그림은 이전에 우리가 많이 보던 동양의 그림과 다른,순전한 서양의 그림이다. 동양의 그림과는 경위가 다른 점이 많고, 그리는 방법도 같지 아니하며, 또한 그림그리는 바탕 (캔버스) 과 쓰는 채색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그림인데, 지금 이 서양화는 동양학보다 세상에 널리 행하더라. 서양화에는 유학·연필학·「데상」 화·「파스텔」학의 여러가지 종류가 있고, 또한 여러가지 파 (派) 가 많이 있는 중에 이 그림은 유학이니, 기름기운 있는 되다탄 채색으로 그린 것이다….경성 수송동에 거하는 춘곡 고희동은… 동경에 건너가 일본 미술계의 척고 학원되는 상야미술학교에서 형설의 공을 쌍아 금년3월이 졸업이라….
이같이 첫 서양화가로서 자주 사회의 학제에 주인공이 됐던 춘곡이 실제 박언를 얼마나 제작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귀국하자 즉시 중앙고진의 도화선생이 됐고, 뒤에 여러사립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더구나 그는 여간한 애사/요,포고가인 그는 제작에 전념할 겨를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해화협사를 주도했다는 점에서는 의기발랄한 신문학 운동가라 해서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내가 본 그의 마지막 유화작품은 선전3회 (1924년)에 출품한 작품으로 기억한다.제목은 기억되지 않으나, 한복의 영감님이 담뱃대를 들고 앉아있는 15호정도의 소품이다.
그가 동양화로 전향한 연유를 다음과 같이 토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동양화나 서양화나 똑같은 예술임에 틀림없는데 굳이 사회와 동떨어진 서양화를 고집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사회는 동양화를 요구하고 있다.』
첫 양학가는 이래서 동양화로 전향한 뒤 다시 유화에 손대지 않았다. 지금 남아 있는그의 작품도 동양화 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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