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림<극작가>|혈루의 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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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차대전후 세계열강국사이의 흥정으로 하여 억울하게 둘로 쪼개져버린 조국의 운명, 애매한 두꺼비 떡돌에 치인 격이 돼버린 이 민족의 비극, 가슴에 피 멍울이 맺힌 채 그 아픔을 참아내려 온 세월이 어언 26년, 그 동안 헤어진 핏줄기에 대한 사념을 하룬들 망각한 적이 있었을까보냐.
어쩔 수 없는 이 절망 속에서 꿈에서나 만나고 꿈에서나 얘기하고 꿈에서나 얼싸안았던 혈연을, 어쩌면 이제 꿈이 아닌 현실에서 상봉할 수 있게될지도 모르니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정세가 이렇게도 급변할 줄이야 너무도 어리둥절하여 실감이 일지조차 않는다.
불러도 대답 없었던 생이별의 가족들, 죽음과도 같았던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우리는 서로 힘껏 껴안으며 응결 졌던 피눈물을 뿌리게 됐다.
가슴이 미어져 만나자 무슨 말부터 열어야 할 것인가. 4반세기동안 쌓이고 쌓였던 그리움의 첫마디는,

<잘 있었냐?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이게 몇 해 만이냐? 그새 어떻게 지내왔어? 많이 변했구나, 보고 싶었다.>
그토록 피맺혔던 가슴이었지만 그 같은 대화로 시작되리라.
돌돌 뭉쳤던 그 아픈 감정을 한꺼번에 풀어헤칠 수가 있을 것인가.
우주인이 달을 정복하고 돌아온 날, 지척이면서도 북녘 땅의 거리가 달의 거리인 38만km보다도 더 먼 듯 하여 갈 수 없는 불가항력의 슬픔을 안타까워했던 일이 새삼 떠오른다.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만난다. 만나고 나면 죽어도 한이 없으리라.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하고도 소박하기까지 한 소원인 것이다.
살아생전에 보고싶은 얼굴, 듣고싶은 목소리, 같이 나누어 보고싶은 체온, 핏줄기끼리 만나고자 하는 이 몸부림은 인간본연의 모습이며 또한 어쩔 수 없는 본능이며 본질이 아니겠는가. 누가이것을 거역하랴.
그러니 만큼 이번 대화의 광장은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순수한 만남이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도 왠지 이 마당에서 기우가 되는 것은 지난 동경에서의 한필화와 한필성씨 와 의 짧은 그 통화의 예이다.
필화는 그리움에 목멘 그 울부짖음과는 달리 오빠의 인간적인 호수에 횡설수설로 답하고 있지 않았는가. 문가 압력을 받고있는 대화의 내용을 볼 때 먹구름 같은 우울증이 없지도 않다.
우리가 목마르게 바라는 건 적나라한 인간적인 그 짙은 목소리이며 감격에 찬 눈물이며 그리움을 확 끼얹어오는 혈육의 체취인 것이다.]
그러한 피의 떨림을 현실에서 실재로 손에 잡듯 뜨겁게 재확인 해 보자는 게 아닌가 말이다. 딴 욕심은 없다. 생존 그 자체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압력으로 하여 대화가 동문서답이어서는 안 된다.
4반세기동안의 이 피맺힌 소망에 보다 인간적인 아량이 있어주기를 빌고 또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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