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남과 북의 포로수용소(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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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딘」 소장의 고난>(4)
괴뢰 4인조장교들은 「딘」 소장이 감시병의 따발총을 뺏어 김 총좌를 죽이고 자기도 자살하려고 하자 장군에 대한 심문과 고문을 중지한다. 「딘」소장의 이와 같은 마지막 시도는 총기 고장으로 실패하지만 이 사건 후 장군에 대한 대우는 약간 개선되고 가장 잔인 악독한 심문조장 김 총좌도 어디론가 사라진다. 6일 동안의 모진 심문과 고문에서 괴뢰들은 장군으로부터 아무런 값진 정보도 캐내지 못했다.
장군의 수기 「죽음의생활 3년」의 계속.

<내가 갇힌 이 건물의 감시병은 모두 20여명이나 되는데 그중 한 명은 늘 건물둘레를 돌고 또 방안에서 나를 지켰다. 이외에도 자루의 총이 겨누고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옆의 감시병실 한구석에 그 놓여있는 나는 어느날 벽구멍을 통해 보았던 것이다. 여차할 때에는 비번의 감시병 중 누구든지 총을 사용하려고 비상용으로 둔 것이 분명했다. 방안에는 나한테서 빼앗아간 침대가 놓여있었다. 김 총좌의 명령으로 그때 내방에는 의자 개만이 남아있었다. 의자는 실내감시병이 감독장교가 안보일 때는 곧잘 걸터앉아 때로는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p>

<김 총좌 죽이고 자결결심>
김 총좌가 나를 전기고문 하겠다는 바로 그날 아침, 나는 『옳지, 오늘이다. 내가 이상 더 고문을 받는다면 몸이 너무 쇠약하기 때문에 혹시 무엇을 불지도 모른다. 저 총을 뺏어야지』하고 생각했다. 나는 전부터 총은 도망치는 방패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만일 아무도 내 길을 막는 사람이 없다손 치더라도 1백「야드」이상을 걸어갈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도망가기는 틀렸다. 고문이 시작되기 전에 빨리 자살해야한다.』 내방의 감시병은 의자에 앉더니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나는 저쪽 방에 있는 20여명의 감시병들을 보았다. 그들이 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 가고 내방의 감시병도 잠을 깨지 않는다면 때는 무르익는 것이다. 5시반쯤에 저쪽 감시병들은 모두 나가버렸다.
김 총좌·최 중좌·홍 중좌·김 소좌들은 부엌 달린 방에서 아직 자고 있으리라고 생각됐다. 통역들은 문이 닫힌 자기네들 방에 들어있다. 감시병들이 나간 후에 나는 살살기어 갔다. 나는 대전에서 그 깡통약실이 달린 자동소총(다발총)을 자세히 보아두었기 때문에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들창 밖으로 한방 쏘자. 만일 김 총좌가 근무에 충실하다면 부엌 방에서 뛰어나와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알려고 할 것이다. 다음 사격으로 그를 넘어뜨린다. 그리고는 총구를 입에 물고 만사를 끝낸다.

<총 만지는 소리에 적 달려와>
그런데 내가 저승으로 갈 때는 반드시 김 총좌를 동반해야한다. 그것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해치워야한다.』
나는 문을 지나고 감시병실 침대 곁을 지나 마침내 구석에 놓인 총 앞에 이르렀다. 총을 살그머니 쥐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방아쇠 안전판을 잡아당겼는데 왜 그런지 그놈의 안전판이 꼭 박혀 움직이지를 않는다. 나는 그것을 고쳐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는 동안 「절거덕」소리도 났을 것이다. 이때 내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홍 중좌가 침대에서 뛰어내려 나에게 달려온다. 나는 기어오면서 방 옆 침대 위에 누가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이것이 실패였다.
이자도 다른 3명의 심문장교들과 함께 부엌 방에서 자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총구를 돌렸다.
김 총좌를 죽일 시간여유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덤벼드는 홍을 넘어뜨릴 수는 있다. 안전판만 빨리 벗겨진다면…. 그러나 홍은 용감했다. 그는 총에 매달렸다. 그때까지도 망할 놈의 총은 불을 뿜지 않았다. 홍은 정면에서 나를 붙잡고 달려온 감시병들은 옆에서 덮쳐왔다. 이래서 쓰러진 내 몸 위에는 10여명의 감시병들이 엎치락뒤치락하게 됐다. 몇 초 동안에 모든 일은 끝났다. 그들은 나를 내방에 끌고 가 의자 위에 앉혔다. R통역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하는 말이 『장군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를 죽이려고 했군요』라고 한다. 『아니, 저놈의 김 총좌 자식과 나 자신을 죽이려고 했지.』
『장군님, 절대로 목숨을 끊으시면 안됩니다. 언제든지 희망은 있는 것이니까요. 저는 장군님이 저를 죽이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나는 그후 김 총좌를 다시 못보았다. 내가 한가지 바랄 것은 그가 죽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와 나는 풀어야할 몇 가지 숙제가 남아있으니까.
감시병이 내 「팬츠」끈을 풀어가고 또 자살도구로 쓸만한 모든 것을 뺏어간 후 나는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최 중좌가 들어와서 『여기와 마을에 감시병을 더 배치했다. 너는 무장폭동의 혐의로 재판에 붙이게 될 것이다. 너는 도망치려고 했지』하고 물었다. 『내 건강상태로 도저히 도망갈 수 없다. 그 대신 나는 김 총좌를 죽이고 자살하려고 했다.』 『아니다. 너는 도망치려고 했으며, 그것은 무장 폭동이다.』

<군정 때 한일 자백을 강요>
그리고 그는 감시병 한 명을 끌고 왔다. 슬프게도 그 감시병은 나를 그다지 구박하지 않고 비교적 상냥하게 대해준 사람이었다. 『네가 나갈 때 자고있던 놈이지?』하며 묻는다. 『아니다. 내가 나갈 때 자고 있던 사람은 홍 중좌였다.』 그러나 최는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홍 중좌는 저 방 침대에 누워 있다가 네게서 총을 뺏었다. 이치가 바로 근무 중에 잠을 잔 놈이다.』 그는 불쌍한 감시병을 끌고 나갔다. 그는 틀림없이 총살당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날 밤 감시병들은 내 침대와 요, 이불, 그리고 내 옷을 도로가지고 왔다. 최 중좌가 아까와는 다른 태도로 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김 총좌는 떠났다. 이제부터는 내가 여기 책임자다. 너는 앓고 있으므로 환자취급을 하겠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당신의 건강부터 회복시켜야겠다.』
그 이튿날 아침 의사가 와서 나를 진찰했고, 10월1일까지는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실컷 잠을 잘 수 있었다. 10월1일 아침에 최 중좌가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일 밤에 나는 여기를 떠난다. 나는 당신한테 정보를 얻어오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그러니 내게 대한 개인적인 호의로서 만일 당신이 다시 남한의 군정장관이 된다면 어떤 정책을 쓰려는지를 말해줄 수 없겠는가? 그리고 당신이 남한에서 잘했다고 느낀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이것을 써준다면, 상부에서는 내가 근무를 성실히 한 것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희망하는 대로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보장한다.』

<"이 대통령 애국자다" 기술"
이 정도의 청은 들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는 짤막하게 한마디 적었다. 남한에서 농업과 공장, 체신기관 등이 그나마도 복구향상 되고 또한 특히 1948년의 총선거가 자유롭게 실시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을 적었다.
최 중좌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도 쓸것을 원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대통령은 자기나라를 사랑하는 헌신적인 애국자이며 조국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 자기의 생애를 바친 사람이다. 그의 하는 일, 생각하는 일은 모두 그의 나라에 최선의 복지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내 글을 받아 쥔 최 중좌는 그런대로 만족하며, 10월2일에 떠나갔다. 그리고 나도 오후 10시쯤에 조그만「트럭」을 타고 이곳을 떠나게 됐다. 이 「트럭」에는 철제금고2개, D통역 괴뢰군 중위 한 명과 세 명의 감시병이 함께 올라탔다. 왠지 일행에서 빠진 R통역은 「트럭」이 막 떠날 때 다음과 같은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후퇴트럭들에 끼여 이송>
『장군님,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아예 자살하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만사가 해결되어 장군님의 가족을 다시 만나 뵐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트럭」에 끼여 북으로 이동했다. 누가 보아도 이 「트럭」대열은 급히 후퇴하는 군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안서 희천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가는데 13시간이 걸렸다. 감시병의 태도는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특히 우라는 감시병은 「트럭」 위에서 나를 따뜻하게 해주려고 담요로 내 몸을 둘러싸고 붙들어주었다. 내가 북한에서 수용생활을 하는 동안 수없이 이런 이동을 했는데 나는 늘 그 앞장을 서는 것 같았다.
이동 첫날밤에 나는 어떤 여관의 마루 위에서 잤다. 그뿐더러 그후 천여일간을 내내 마루 위나 「콘크리트」 위나, 혹은 굴뚝이 통해있는 더운 진흙 매질한 온돌방 위에서 잤다. 부엌 하나에 방 둘이 달린 북한의 전형적인 집에서 나는 3년을 지냈다. 희천에 2∼3일 머무르는 동안 나는 포로로서의 생활을 달게받고, 이 시련을 이겨내 보자는 결심을 하게되었다.>
◆주요일지(1950년11월24, 25, 26일)
※11월24일▲「맥아더」, 「유엔」군의종전대공세 명령▲미24사단, 정주통과▲미「탱크」대, 신의주우방 8「마일」에 도달▲정부, 국민방위군설치법안을 국회에 제출
※11윌25일▲수도사단, 청진돌입▲중공군, 영원에 침입▲한국제2군단부대, 적반격으로 후퇴▲미, 대일강화조약 체결 서둘러
※11월26일▲미해병대, 장진호서 중공군과 격전▲적반격으로 덕천상실▲「유엔」 신한위서울착▲3개월 적치하의 서울시민 사망 1만7천명이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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