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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단체의 역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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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의 여성 해방 운동은 최근에 성의 정치론(sexual politics)에서 실제 정치론(real politics)으로 그 양상을 바꾸어 3백여 명의 여성 지도자들이 「남성과의 동등한 정치 참여」를 목적으로 하는 전국 여성 정치 협의회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정치는 모든 분야의 최고 차원을 점유하고 있어 경제·사회·교육·문화 정책 등이 모두 정치 과정을 통해서 산출된다는 원칙을 감안할 때 이들의 목적은 납득이 갈만하다. 그러나 흥미 있는 일은 이러한 미국 여성들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닉슨」 대통령과 「로저즈」 국무장관의 반응이었다.
가장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들이건만 여성 멸시 본능이 앞서 자기들의 현재 직위와 여성 유권자들과의 상관 관계를 잠시 망각하고 빈축의 발언을 실토함으로써 여성들의 비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한 토막 이야기를 통해 선진 국가인 미국에서는 여성들이 소위 2류 시민의 위치에서 발버둥치고 있으며 남존여비 사고 방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엿볼 수 있는 듯 하다. 그러면서도 재선을 노리는 미국 대통령은 자기의 실언을 몹시 후회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즉 민주 사회의 주권 재민 원칙을 여성 단체가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남성 정치 인물도 자기들의 편견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정치 사회 학자인 「랜싱」 여사도 말했듯이 여성 유권자들이 뭉치면 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형성할 수 있으나 『여성의 불행은 자기들의 불행을 인성하지 못한다는데 있다』고 한「키에르케고르」의 말과 같이 여성들이 스스로의 문제 의식이 희박하기 때문에 뭉치지 못하며 따라서 사회의 대 여성관이 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 발전도 지연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문제 의식이 뚜렷한 여성 「엘리트」는 여성 단체를 매개체로, 아래로는 권리 뒤에 잠자는 여성 인구에 대한 계몽, 교육에 역점을 두면서 위로는 여성들을 대변하고 여성들의 정당한 요구의 정책적 반영까지 시도하는 압력 단체의 구실을 해야될 것이다. 이러한 여성 단체의 역할은 오직 여성 지위 향상이라는 이기적 편파적 목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문제 시정에 시민으로서 참여하는 데에도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부정 식품·공해 문제·과외 공부·근로자 문제 등 얼마든지 여성 단체가 여론화 과정에서 정책 결정 단계에까지 작용할 권리와 의무와 능력이 있는 것이다.
과거의 비조직적이며 인물 중심의 단편적인, 그러나 한때 순수하던 여성 운동이 근년에 와서 문제를 보다 객관적으로 연구·검토해 보려는 세련된 여성 단체의 경향은 늘어가는 「세미나」 「심포지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아직도 아쉬운 점은 「세미나」같은 모임이 모임에서 그치지 말고 얻은 결론이 실천에 옮겨질 때까지 추적하는 자세라 하겠다. 끝으로 여성 단체의 역할이 결실을 얻으려면 사회의 빈축과 조롱을 받는 극단적이며 과격한 요인은 배제해야 될 줄 믿는다. 여성 단체 지도자들의 몸가짐, 발언, 실력 등도 그와 관련하여 중요한 요인이 아닌가 생각된다.<이범준(이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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