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제자는 필자>|<제14화>무역…8·15 전후 (8)|전택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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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 이후 약 1년 반, 그러니까 1947년3월17일 「마카오」에서 해방 후 최초의 무역선인 「피어리오드」호가 인천항에 들어와 소위 「마카오」 무역이 시작되기 이전의 무역은 밀무역과 다름없는 이른바 「장크」무역 시대였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 나라 경제는 일본 경제와의 유대가 단절되었을 뿐 아니라 38선에 의한 남북 양단이란 불의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어 남한 경제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생산은 원료 부족과 보수 기자재 부족에 행정 공백까지 겹쳐 거의 중단 상태였으며, 특히 식량난과 주택난이 극심했다. 식량난과 주택난이 극심했던 것은 생산 활동이 정지된 이외에 해방과 더불어 약 2백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해외 및 북한으로부터 유입된 데도 큰 원인이 있었다.
여기에 정치적·사회적 혼란까지 겹쳐 물가는 천장을 모르고 뛰었다.
이런 가운데 성행한 것이 바로 「장크」 무역이었다. 그래서 무역 업계는 초창기부터 비교적 활기를 띤 업종에 속했다.
「장크」 무역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당시 물건을 날라 온 배들이 대부분 중국인들의 자그마한 「장크」였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장크」무역이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억으로는 46년에 이 무역이 활발했었는데 그 이전, 그러니까 해방 직후에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얘기로는, 해방 직후에는 한때 대일 밀무역이 성행했다고 들었다. 밀감을 비롯해서 각종 식료품과 「시멘트」·「카바이드」·가성소다 등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성행했던 것은 중국 본토를 상대로 한 「장크」무역이었으며 이 무역을 통해서 주류·낙화생·낙화생 기름·고추·마늘·한약재·신문 용지·옷감 등 그 당시 생활에 긴요했던 물자들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당시 「장크」무역선은 거의 모두 중국 위청도 방면에서 오는 것들이었다. 중국 상인들이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을 「장크」에 가득 싣고는 인천으로 들어왔다. 군산과 목포로 온 것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 인천으로 몰려왔다.
산동 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인 데다가 소비지인 서울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때 중국 상인들이 물건을 판 댓가로 가져간 것은 주로 해산물과 인삼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화폐가 있었지만 옛날처럼 통용될리 없었고 또 너나 할 것 없이 워낙 물자가 부족했던 때라 「무역」하면 으례 물물교환이었다.
「장크」선 중에는 간혹 우리 나라 사람이 끌고 오는 것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드문 「케이스」였으며 설사 있었다고 해도 대개 중국 상인들의 물건을 대신 운반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청도 방면으로 직접 물건을 싣고 가서 필요한 물자와 교환해 온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한번은 박욱 (재일) 이란 사람이 당시 조그마한 발동선에 마른 오징어, 건명태, 해삼 등의 해산물을 가득 싣고는 청도에 가서 처분하고 비단을 비롯한 각종 직물을 구해 갖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월남 직후 나는 잠시 정계 인사들과 자주 접촉했었으며 앞서 얘기했듯이 김인형씨 권유로 대한상사에 잠시 있다가 천우사를 설립한 것은 「마카오」무역이 막 시작될 무렵인 1947년3월이었기 때문에 「장크」무역에는 손을 댈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장크」무역은 인기였으며 따라서 많은 무역 회사가 설립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화신은 해방 전 국내 유일의 종합 상사로서 이 분야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며 때문에 해방 후 무역 회사를 직영하거나 다른 회사 중역으로 옮겨간 사람이 많이 있다. 뒤에 좀 더 상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주요한, 안동원 한종민 김정중씨 등이 모두 그 예에 속한다.
당시 무역은 물가가 천장 부지로 뛰던 때였기 때문에 물자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몇 갑절이고 남는 장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방에 줄 물건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장크」에 싣고 온 물건을 사는 일이었다.
「장크」무역선이 인천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서울에 있는 무역상들이 줄을 지어 인천으로 달려갔다.
지금도 인천에 가면 중앙동과 해안동 일대에 중국 음식점이 많이 있는 것을 본다.
물론 해방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이었지만 당시 이 일대는 「장크」를 몰고 온 화상과 우리 나라 무역상들로 성시를 이루곤 했다.
무역상들은 그곳서 며칠씩이라도 묵으면서 화상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해가며 상담을 하고 물건을 사기에 바빴다.
더러는 서울 와서 묵는 화상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개 지금 회현동 부근 어딘가 있던 『신민 여관』에 자주 묵곤 했었는데 누가 왔다는 소문만 나면 먼동이 틀 무렵부터 명함을 내놓고 만날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 나라 상인들이 줄을 이었다.
이러니 화상들의 콧대가 오죽이나 높아졌을까. 국제 시세고 뭐고 알 턱이 없는 판만에 팔 사람보다 살 사람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달라는 게 값이 될 수밖에.
그래서 당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개중에는 손해를 본 사람도 없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는 『억울한 무역』이었다. 그나마 당시로서는 아쉬웠던 이 「장크」무역도 중국 대륙이 차츰 적화됨에 따라 47년 봄부터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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