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의 비록 미 월남 개입사-NYT지 보도 내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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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편집자 주=다음은 게재여부를 둘러싸고 법정투쟁으로 번지기 전까지 「뉴오크·타임스」 지가 연재한 미국의 월남전 개입경위를 다룬 미국무성 비록의 64, 65년 부분 중 오점을 발췌한 내용이다.
【워싱턴 21일 AP동화】65년 봄 미국이 지상군 파월을 결정했을 때 이것은 「아시아」에서의 지상전에는 또 다시 개입치 말라는 한국전에서 배운 뼈아픈 교훈을 저버린 처사였다.
「린든·존슨」대통령은 북폭 한달 후 폭격만으로는 월맹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통령의 이 같은 결정을 예견했던 당시의 국무차관 「조지·볼」씨는 이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 대통령에게 각서를 보내 협상을 제의하면서 『협상의 대안은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끝없는 장기전, 미 사상자의 속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의 봉쇄, 확전일로의 심각한 위험뿐 일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월남참전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북폭과 미 지상군 투입이 있기 한해전인 64년 봄이었다.
64년 1월 22일 「맥스웰·테일러」장군이 의장으로 있던 합참본부는「맥나마라」국방장관에게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촉구하는 제의를 각서로 내놓았다.
이 당시 월남정부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고 「베트콩」은 날로 득세하고만 있었다. 이 건의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 『합참본부는 월남에서의 미국입장은 전동남아지역에서의 미국입장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척도가 된다는 의견을 날로 굳히고있다.
월남이 공산수중에 들어간다면 동남아 여타지역에서의 미국입장은 날로 잠식당할 것이다.』 합참본부는 미군이 월남 군으로부터 월남전의 전술임무를 인수하고 월맹을 폭격하는 한편 월맹에 대한 월남군 특공대의 기습을 건의했다.
행정부는『작전계획 34A』라는 비밀명칭아래 월맹에 대한 은밀한 공격을 전개키로 결정, 2월부터 월남군 특공대를 투입하여 월맹해안의 철도시설·교량 등을 파괴케 하고 공작원 및 심리전 요원들을 공중 투하하는 한편 정보입수를 위해 월맹인 납치를 하기 시작했고 U-2기로 월맹상공을 비행하게 했다.
같은 해 3월「맥나마라」장관은「사이공」방문으로부터 돌아와 월남정세가 암담하다고 전하고 월남 군을 시켜 「라오스」내 호지명 통로를 공격케 하는 한편 미 군기지원 하에 월남공군기들을 월맹에 출격시켜 군사 및 산업시설들을 파괴케 하자고 제안했다. 「존슨」대통령은 이 계획안을 승인했으나 이중 일부는 켤코 수행되지 않았다.
「윌리엄·번디」 극동담당 국무차관보는 64년 5월 월맹에 대한 군사압력을 가중시키기 위해 미군기의 전면 북폭을 골자로 한 한 계획안을 대통령에게 제시했다. 그는 이와 관련, 『「베트남」에 관한 한 필요한 어떠한 권한이라도 수권 하는』 의회결의가 소망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전쟁확대와 국회로부터의 수권을 건의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 여름「존·맥노튼」국방차관보는 월남에서의 미 목표를 피력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각서를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제출했다. ①자유수호자로서의 미 명성에 굴욕적인 패배가 있어서는 안되겠다 ②월남영토를 중공 수중에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야한다 ③월남인의 생활수준을 높여야한다.
이해 8월 월맹을 공격할 특공대를 위한 정보수집 차 「통킹」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 구축함「매독스」호가 월맹군 어뢰정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해왔다고「매독스」호와 합류한 구축함 「C·터너·조이」호도 역시 피격되었다고 정부 발표는 전했다.
이 소식이 「워싱턴」에 전해진지 12시간만에 미 함재기들은 보복 차 첫 북폭 길에 오르고있었다. 미 행정부에 의해 기초되고 「존슨」 대통령에게 광범한 월남작전 수행 권을 부여한 「통킹」만 결의가 이 구축함 피격소식 때문에 손쉽게 의회를 통과했다.
이상과 같이 이루어진 미국의 첫 북폭은 국내에서의 논란이 태무한 가운데 월남전에 개입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상의 사태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에서 「존슨」 은 대대적인 북폭을 주장하는 공화당 대통령후보 「배리·골드워터」와 맞서 이성적인 인물의 「이미지」를 부각, 64년 11월 백악관에서 열린 전략회의에서는 65년 초부터 전면 북폭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으나 『전술적 고려』에 비추어 한동안의 연기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존슨」은 『이성과 자제』의 후보로「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었고 『최대한도의 일반 여론 및 국회의 지지』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 백악관 전략회의에서는 북폭을 정당화하기 위해 월맹의 도발행위를 유도하자는「맥노튼」의 제안은 기각되었다. 첫째 월남정부가 미약한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북폭이 월남에 대한 공산 측 보복을 초래할지 모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번디·메모」에 따르면 『그러나 10월초까지에는 이런 조치를 건의할 생각』으로 기록되어있다.
64년 11월 1일 「베트콩」이 「비엔호아」 공군기지에 대대적인 박격포 포격을 가해 미군4명을 죽게 하고 B-57폭격기 5대를 파괴하자, 합참본부는 전면 북폭을 비롯한 강경 노선을 주장하게 되었으나 주월 대사로 나가있던 「테일러」 장군은 월맹 내 제한목표만의 폭격을 주장, 온건론을 폈다.
「존슨」대통령은 이 두 주장을 모두 물리치고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백악관에서의 한 모임에서 「존슨」 대통령은 북폭이 월남 내 미군기지 또는 민간인들에 대한 월맹 또는 중공의 보복공격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염려를 표명했다.
아무조치도 취하지 않기로 한 「존슨」대통령은 그러나 월맹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및 군사적 조치를 건의할 연구위원회를 임명하고 「번디」를 위원장에 앉혔다. 이 연구위원회는 「존슨」이 선거에서 압승한 11월 3일 첫 회합을 가졌다.
「번디」는 보고서에서 『「비엔호아」는 언제 또 다시 되풀이될지 모른다. 이는 우리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겠으나 한편으로는 보다 강경한 조처를 취할 수 있는 도약대로 마련해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이어 『우리가 매우 강경한 조치를 취하더라도 의회의 추가수용은 필요 없겠지만 그러나 주요결정을 취하기에 앞서 먼저 의회와 협의해야 할 것』이라고 건의하고 있다. 북폭을 건의한 이 연구 위의 보고는 11월 중 소집된 회의에서 상당한 의견대립을 보였다.
「러스크」국무장관은 북폭 안을 지지하나 북폭 만으로 월남정부구출에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월남정부를 구출하려했다는 국제적 인정은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번디」 및 「맥노튼」의 견해에는 동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러스크」는 『미국 노력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그것이 실패할 경우 미국입장은 더욱 난처해 질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합참의장 「얼·휠러」장군은 강경한 즉각 북폭론을 주장했다. 이 회의는 아무 결론 없이 산회했다.
3일 후 열린 각료 급 회의에는 북폭의 점진적 강화를 주장하는 「데일러」대사도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데일러」대사는 이 같은 북폭이 2개월 내지 6개월 간 계속되면 「하노이」가 굴복, 전쟁 종결을 위한 협상에 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건의는 「존슨」에게 제출되었다. 「존슨」도 『외형적인 위협을 최소한도로 줄이는 한편 적의 목을 서서히 죄는 힘이 증강되면 「하노이」도 마침내 협상에 호응, 미국에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에 동조했다. 그러나 이 건의안도 즉각 실천에 옮겨지지 않고 있다가 65년 2월 중부고원지대 「플레이쿠」의 미군사고문단 숙소가 「베트콩」에 피습되어 미 전폭기 47대가 월맹 내 72km지점 「동호이」에 출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2월말 미 행정부는 북폭의 계속감행. 폭격규모의 점진적 강화를 내용으로 한 『롤링·선던』작전을 명령했다. 『그러나 북폭 결과는 「하노이」의 뼈대를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 미 당국자들은 이 『롤링·선던』 작전이 월맹으로 하여금 협상에 동의하는 시기를 훨씬 앞당길 것으로 기대했었다. 한달 동안의 북폭이 별 무 성과임이 밝혀지자 낙관론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미국으로서는 이제 월남운명을 월남인들에게 맡기고 완전철수하든지, 당초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 지상군을 투입하든지 양자택일의 입장에 서게되었다.
북폭을 대폭 강화한다는 제3안은 중공개입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기각되었다. 65년 3월 8일 공군기지 방어임무에 국한한다는 엄명 하에 미 해병 2개 대대가 「다낭」에 상륙했다. 북폭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것을 깨달은 미 항공 부는 65년 4월 1일 주월 미 해병 2개 대대에 공세를 명령했다. 「존슨」은 또한 미 해병 2개 대대를 증파하는 한편 지원병력을 1만 8천 내지 2만 명 증강키로 했다. 그는 이상 조처를 비밀에 붙이도록 명령했다.
「존슨」은 각급 관리들과 만난 후 3월 31일 기자회견에서 극적인 어떤 새로운 사태발전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현재 고려 중에 있는 장기적 안목의 전략이란 아무것도 없다』 고 답변했다.
4월 2일 「존·C·매콘」 CIA부장은 미 전투군의 투입은 『월맹에 대한 미군기 공격이 월맹에 실질적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서한을 「러스크」에게 보냈다. 그는 『그렇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길 수도 없고 또 빠져 나오기도 힘든 밀림 전에 스스로 깊숙이 빠져들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65년 6월 주월 미군사령관 「윌리엄·웨스트모얼랜드」장군은 미군 증강 시까지의 패북을 막기 위한 미군 20만 명의 파월을 요청해왔다.
「존슨」은 지체 없이 이 요청을 승인하고 이어 7월 중순에는 추가 파월을 명령했다. 「존슨」은 명령도 또한 비밀에 붙이도록 했다.
65년 말까지 미군병력은 18만 4천 1백 34명으로 늘어나고 이 숫자는 점차 50만 이상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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