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9)|<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자는 필자(170)해방되자 한국인들 자치회 구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해방전후>
1941년에 은행령이 개정된 후 대구 상공은행이 상업은행에 (41년), 경상 합동은행이 한성은행에 (41년), 호남은행이 동일은행에 (42년) 각각 흡수되었다. 그 뒤 동일은행은 43년 한성은행과 합병하여 조흥은행으로 발족되었다.
해방직전인 45년6월 현재 우리나라의 금융기구는 조선은행·식산은행·저축은행·상업· 조흥 등 2개 일반은행을 합쳐 모두 5개로 정비되었고, 지점은 2백47개에 달해 외관상으로는 제법 근대적 체계를 갖추었다. 은행별로 전문적 기능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내용 면에서는 형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전근대적요인을 갖고 있었다.
우선 중앙은행의 일반은행 업무경영은 말할 것도 없고, 금융기관의 기능 면에서 보더라도 여신업무에 주력했던 점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예금은행으로서의 구실을 못했다. 금융기관대출은 총 예금의 2배에 말할 정도로 오버·론이 극심했다. 금융기관의 지점 설치도 우선 예금 흡수량을 추징해서 수지예상을 한 다음에 결정하지 않고 우선 정책적으로 금융지원이 필요한 곳에다 설치하곤 했다. 이는 물론 식민정책과 군수산업지원이라는 일제의 정책목표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금은행으로서의 기능이 약했기 때문에 대출재원을 예금 아닌 채권발행에 의해 조달했던 것도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채권발행기관은 식은·동척 및 금융조합연합회였는데 채권인수는 대부분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한성·동일·천일 등 일부 한국계 은행은 조선은행의 재할을 받기도 했으나 워낙 조선은행의 발권능력이 제약을 받고있어 자금부족을 충분히 완화시키지 못했다. 중앙은행으로서의 조선은행이 그의 통제력을 여타 일반은행에 충분히 미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같은 발권기능의 제한이외에도 채권발행으로 일본에서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조선은행의 자금관리 대상에서 벗어났고 일본계 은행의 국내지점도 자금수축을 그들 본점에서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금융기관들이 정통적인 발전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책적 필요에 따라 이식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정책금융기관인 조선은행·식산은행·금융조합 등 특수은행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고 반대로 일반은행은 보조적 위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체계가 약체화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룰 무렵 손이 모자라 조선은행은 부득이 한국인에게도 요직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고 유화정책으로 한국인에 대한 대출도 약간씩 늘어났다.
45년 1월에 원인 모르는 불이 나 본점건물이 깡그리 타 버틴 사고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건물의 사면이 석축이어서 불이 나자 은행내부는 흡사 스토브 속의 나무처럼 홀랑 타 버렸었다. 이때도 일경은 민족감정으로 인한 방화가 아닌가하여 그날 숙직했던 한국인들을 모두 불러 사상관계를 조사했으나 화인은 영 밝혀지지 않았다.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여서 건축자재는 물론 모든 물자가 귀했을 때인데도 당시 서무부장이던 일인 (훤장창 이라고 기억된다)은 천장절이던 4월29일까지 3개월 동안 본관건물을 완전 복구해 내어 세인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이 일인은 백두진, 문상철·곽준열씨 (현 외환은 서소문 곽협두 지점장선친) 등이 목포지점에 있을 때 지배인으로도 지낸 친한파로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일인들을 쩨쩨하다며 거래선은 꼭 한국 사람만 골라 인기가 좋았다.
해방이 되자 국내외각지점에 흩어져 있던 직원들이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속속 귀국했는데 본점에는 나 (당시 계산과장대리였다)와 대부에 박승준씨, 국고에 나정호씨, 출납에 이기종씨, 서무에 박근수씨 (이사·제일은행 전무역임)·이의두씨 (제일은행 상무역임) 등 몇 분밖에 없었다.
해방직후부터 미군이 진주한9월9일까지는 완전한 공백기간이어서 혼란이 심했다. 그때 본점에 남아있던 분들로 자치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내가 위원장을 맡아보았다.
뒤에 구용서씨가 일본에서 돌아와 위원장 일을 넘겨주었다.
9월의 미군진주이후 군정에서 파견한고 R·D·스미드 장군과 그의 부관 C·C·스트링거가 고문으로 와서 11월에 스미드가 총재로 취임, 이 사진을 구성하고 각급 부서장을 임명했다. 이사로는 스트링거 구용서씨 백두진씨 고 최순주씨 김문성씨 고 김성권씨(동일은행계) 등이 선임되었고 나는 감사를 맡았다.
이 이사회 구성과정에서 군정 측과의 이견으로 약간의 혼선이 있었다. 그러나 스미드 총재와 스트링거 이사를 제외하곤 조선은행 재 직원이 모두 한국인들로 출범했다는 감회가 실로 컸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