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급되는 한국 여성 개화기|국사 편찬위 연구관 박용옥씨 논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국 여성 개화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 또는 둘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한국 여성사의 체계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그것의 해결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며 또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필자는 한국 여성사에 관한 몇 개의 논문을 정리 발표하는 가운데 여성 개화의 깃점을 기독교 선교의 한 목적 내지는 수단으로 세워진 1886년의 여학교 (이화 학당), 즉 기독교의 영향에 두는데는 적지 않은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17∼18세기 이후 19세기말까지 여성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고 있었음을 사료를 통하여 찾아 볼 수가 있었으며 또한 그 변화 발전이 한결 같이 개화를 향하고 있는 성질들의 것으로 분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18세기라고 하면 유교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했던 조선 사회에 대한 스스로의 비판과 반성이 행해지면서 점차 그 사회가 변해 발전되어가던 때로서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은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천주교였으며, 유교적인 생활 규범을 절대시하였던 여성 사회에 변화를 초래케 한 것도 천주교의 전래와 전파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천주교는 구 사회 체제를 구축해 왔던 유교적인 제반 제도를 부인하여 천주 안에서의 인간의 평등 봉건적인 신분 체제의 부인, 제례의 거부, 유교적인 충효 이념과의 상위 등 구 사회 체제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 속에서의 여 신도들의 신앙 활동은 유교적인 가족 제도를 붕괴시키는 것이며, 또한 유교적인 질서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유년 천주교도 박해시에 사학 (천주교) 죄인과 죄수로서 국문을 당하였던 강완숙은 덕산의 사족 홍지영의 부인이었는데 그는 천주에 대한 신앙을 의하여 남편과 가정을 버리고 전도 사업에 나섰다.
그것은 강완숙의 인안에 『강녀의 지간지 요함이 비단 이 한사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족 여행을 논할 것 없이 이런 부녀가 허다하며 불가불 탕진해야 한다』고 한 것으로써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천주교 여 신도들의 활동은 곧 이미 18세기로부터 여성의 개화성이 보이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개화성은 천주교의 울타리 밖에서도 행해지고 있었음을 찾아 볼 수 있으니 과부 개가 금지의 비판 시정의 의식이 이미 싹트고 있었다든지, 또는 학문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 문집을 남기고 있는 부녀들도 적지 않았다든지 자유 결혼을 주장하는 여인도 나타났다는 것 등이다.
또한 19세기에 창조도 동학의 교리에서도 여성의 개화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 동학에서는 도의 초보를 가도 화순에 두고 있어 부녀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와 인격적인 존중을 교리로 가르치고 있었으며 2세 교조 최시형에 이르러 보다 구체화되었다. 그는 1885년에 상주에서 교도에게 강도 할 때 『내 일찍 청주 서타순 가를 지나다가 그 자부 직포의 성을 듣고 서군에게 물으되 군의 자부가 직포하느냐, 천주 직포하느냐 함에 서군이 내 말을 불변 하였나니 어찌 서군 뿐이리오』고 하였다.
유교적인 질서·생활 규범을 위하여 부녀 소아의 지위가 소홀해질 수 있었던 조선 사회에서의 여성관의 애화를 이와 같이 동학에서 그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동학교도들의 오랜 수도 생활 속에서 부녀 소아에 대한 한울님으로서의 존중관은 1894년 동학 구도의 봉기에서 22세의 젊은 여자 수령과 14세의 소년 수령을 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 조약은 국민 생활과 국가 사회 전반에 걸쳐 점차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었으나 유교적 이념의 사회 체제를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을 요하였다.
조약 내용에 따라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기수의 일본 문견기인 『일동기유』에서 여성개화성의 의식은 찾아볼 수 있으나 한국 여성의 개화 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기는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박영효가 1888년1월13일부로 상소한 「개화 상소」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개화 상소에서 부녀에 대한 학대의 금지·교육시여의 균등시행 (남녀 6세 이상 취학)·과부재가의 인허 및 남자의 취첩 금령 등을 들고 있다.
박영효의 개화 상소는 1888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갑신개혁의 기도가 3일 천하로 막을 내려 이들 개화파의 개화 경륜은 한번도 펴 볼 수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개화의 실상은 어쩌는 수 없이 망명 생활 속에서 밖에 찾아볼 수가 없게 되며 그렇게 볼 때 1888년 박영효의 개화 상소에 보인 개화 사장은 1888년까지도 소급될 수 있는 것이다. 「근대화가 주체적인 의식이 작용」해야 한다면 박영효의 개화 상소는 개화기 여성 개화의 모태가 되어져야 하는데 조금도 인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