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경쟁구도 속 동남아, 중국 옆으로 한 발짝 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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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사람들이 미국과 중국을 보는 시각은 “USA is a geopolitical power. China is a geographical power”라는 말로 표현된다. 미국은 전략적 필요에 따라 동남아로 돌아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지만, 중국은 싫든 좋든 같이 살 수밖에 없는 토착 세력이라는 의미다. 미국이 다시 떠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경구(警句)로서 오바마 정부가 “America is back in Asia”를 선언하고 동남아 외교활동을 확장할 때 회자되었다.

미·중 양국 지도부와 외교라인이 올해 전면 개편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되었으나 국무장관, 국방장관,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교체되었다. 중국도 시진핑 체제가 출범하면서 총리, 외교부장, 당 외교라인이 바뀌었다. 이러한 지도부의 개편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것은 미·중 관계의 변화, 특히 동남아에서 미·중 경쟁 관계가 변화하는 조짐이다. 동남아에서 일어나는 미·중 경쟁에 묘한 반전은 그들의 경구를 되살리게 한다. 한국에게 주는 정치·경제·전략적 함의는 무엇일까 하는 고민도 하게 만든다.

미국의 ‘점잖은 무관심(benign neglect)’

올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가한 미 국무장관의 태도가 달라졌다. 전임 장관 클린턴은 2010년 ARF에서 남중국해를 자국의 ‘핵심이익(core interest)’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입장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뿐 아니라 베트남·필리핀 등을 규합해 중국에 반격을 가함으로써 중국 외교부장을 크게 당황케 했다. 클린턴은 장관 취임 한 달 만에 인도네시아를 방문했고, 매년 3~5차례 동남아를 순방하며 중국의 안보 위협을 지적하고 미국의 존재 가치를 높였다. 미얀마와의 관계 회복,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가입, 메콩 하류 협력 사업(LMI) 등이 이러한 미국 전략의 일환이었다.

반면 현 켈리(Kerry) 국무장관이 동남아를 첫 방문한 것은 7월 초 브루나이에서 개최된 ARF 회의 참석차였다. 그 사이 4~5차례 중동을 방문한 것과 대조적이며, 전임자가 수시로 동남아를 방문한 것과도 극명한 차이다. 켈리는 당초 ARF 회의를 마치고 아세안 몇 나라를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중동 사정이 급하다는 이유로 계획을 연기했다. 한 동남아 기자가 미국의 pivot to Asia 정책이 바뀌었느냐고 질문했지만 그런 의구심을 불식시킬 만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남아에 대한 관심이 낮다는 인상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는 이번 ARF에서 과거와 달리 남중국해 문제를 아예 쟁점으로 삼지 않았다.

부드러워진 중국

지난 수년간 중국의 경성(硬性) 외교(assertive diplomacy)는 동남아 국가들에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했다. 중국은 2000년대 초반까지 동남아에 대해 미·소 외교, 경제 및 다자 지역 협력을 활용해 윈-윈 전략을 취한 결과 ‘중국기회’론이 확산될 정도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경성외교가 등장하자 동남아는 다시 긴장했다. 급기야 2012년 7월 아세안외교부장관회의(AMM)에서 아세안 내 친중국과 반중국 세력 간 반목까지 나타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내에서는 동남아 정책에 대한 반성론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당시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수습에 나서기도 했다. 중국 신정부의 외교부장 왕이는 3월 취임 후 8월까지 세 번이나 아세안을 찾았고, 중-아세안 외교부장관 전체회의도 두 차례나 하는 등 동남아 중시 외교를 강조하고 있다. 남중국해 문제에 관한 ‘선언’(2002년)을 ‘규범’으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도 개시하기로 약속했다. 지난 6월에는 중국에 불만이 많은 베트남 국가주석을 베이징으로 초청했다. 2년 만의 방문이다. 한동안 소원했던 미얀마와의 관계 회복에도 적극적이다. 중국 정부는 동남아에 관한 한 과거 수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중이 ‘경쟁과의 대립’에서 벗어나려는 조짐은 지난해 11월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때부터 분명해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 직후 동남아를 방문해 아시아 중시 정책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최대 쟁점인 영토 문제에 관해 ‘관련국’들의 냉정을 요구하는 데 그쳐 중국과 일전을 벼르던 베트남과 필리핀·일본을 실망시켰다. 미·중 정상은 지난 6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만나 ‘대국적 협력관계’에 합의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아직 미지수이나 7월 ARF에서 보여준 캘리의 태도는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한국, 창의력으로 무장된 중진국 외교 절실

이러한 변화에 동남아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미·중 경쟁 시기에도 아세안 국가들은 미국과의 ‘안보협력’이 갖는 한계를 알고, 중국과의 ‘경제협력’ 끈을 약화시키지 않았다. 베트남은 그동안 유보했던 하노이-쿤밍 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했고, 미얀마~쿤밍의 석유·가스 파이프라인 공사가 완료돼 지난 7월부터 가스 송출이 개시됐다. 라오스-태국 연결 메콩대교는 올 11월 개통된다. 이 대교가 완성되면 라오스를 경유한 중국~태국간 국경 무역이 한층 활성화될 것이다. 쿤밍~싱가포르 고속화 철도 건설 계획에 관한 논의도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일본 등 역외국의 안보 지원 약속이 중국·아세안 경제협력 증가를 막지 못한 것이다. 최근 미국의 금융완화정책이 동남아 경제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는 현실도 중국의 동남아 진출 전략에 유리한 국면이다.

동남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와 서남아, 태평양과 인도양, 최대 신흥 경제국인 중국과 인도 사이의 연결 고리에 위치한다. 이러한 전략 지역에 미·중 관계의 변화가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첫째, 미·중 관계 변화는 동남아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의 태도 변화가 세계 전략 수행 능력과도 무관하지 않다면 미국의 향후 행보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한국 경제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최근 한국의 대동남아 투자가 크게 늘어나고 일본·중국의 진출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큰 나라의 ‘정치 경쟁’이 다수 나라의 ‘경제 경쟁’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국과 아세안 중견국 간의 협력론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은 과거 시대 변화에 맞추어 외교적 창의성을 발휘해 지역 정세를 변화시킨 적이 있다.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창의성이 요구된다.

<필자 프로필>

이선진

주 인도네시아 대사 및 주 상하이 총영사, 본부 중국과장, 외교정책국장 및 실장, 주 미국·중국·일본 대사관을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외교부 퇴직 후 중국·아세안(미얀마·라오스·베트남) 국경 등 광범위한 지역에 대해 현지 답사를 하고 있다. 올 1월에도 ‘하노이~중국 국경~쿤밍(윈난)~라오스 국경~루앙푸라방(라오스)~비엔티안’을 기차·자동차를 이용해 육로로 여행했으며, 미얀마(Muse)~중국(瑞麗) 국경 지역 육로 여행, 중국~태국 사이 메콩강 선편 여행, 하노이~난닝(廣西) 철도 여행의 경험도 있다. 저서로는 『중국의 부상과 동남아의 대응』(2011), 『대사들, 아시아 전략을 말하다』(2012·이상 편저)가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 협력 및 동남아 관련 다수의 기고 및 칼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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