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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그대로 빠져들 수 있는 게 모던 발레 매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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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호 16면

‘오네긴’중에서(2013)

지난 7월 초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 ‘오네긴’ 공연 당시 세간의 관심은 세계적인 스타 로베르토 볼레의 첫 내한에 쏠렸다. 한국인 최초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수석무용수 서희와의 커플 공연인지라 더 그랬다.

유니버설발레단 ‘디스 이즈 모던’의 간판스타 이동탁

그러나 이 와중에 발레 매니어들이 주목한 또 한 명의 발레리노가 있었으니, 국내 남성 무용수 중 세 번째로 오네긴이 된 이동탁(26)이다. 유니버설발레단 입단 3년차.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주역을 꿰찬 이 젊은 신예는 여인의 순정을 짓밟고 뒤늦게 후회하는 나쁜 남자의 내면을 디테일하게 연기해 ‘준비된 오네긴’이란 호평을 받았다. 공연 직후엔 수석무용수로 고속 승급해 또 한번 화제가 됐다.

24일부터 27일까지 이어지는 유니버설발레단의 모던 레퍼토리 ‘디스 이즈 모던’에서도 두 작품에서 맹활약할 예정이다. ‘고상한 클래식만 발레가 아니다. 모던 발레엔 열정과 섹시함도 있다’며 공식 포스터까지 단독으로 장식한 이 청년은 발레의 화끈한 매력을 어떻게 보여줄까.

‘심청’중에서(2013)

만남은 반전이었다. 그를 주목하게 된 건 지난 5월의 ‘심청’ 공연. 선장 역할을 맡아 남성 군무를 이끌며 파워풀한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카리스마는 그냥 지나치기 아쉬울 정도였다. 그런데 무대를 압도하던 야성미를 테이블 너머론 느낄 수 없었다. ‘디스 이즈 모던’ 포스터가 멋지다고 입을 떼자 “장난처럼 찍은 건데 우연히 잘 나왔다”며 말근육에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미소를 짓더니, 귀를 쫑긋 세워야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대답을 이어갔다. 날카로운 눈매와 달리 순수한 눈빛을 가진 이 청년에게 나쁜 남자 오네긴 역할이 버겁지 않았냐고 물었다.

“전부터 꼭 해보고 싶은 캐릭터였거든요. 엄청 부담스럽긴 했죠. 첫 공연까지 맡게 돼서 전날 딱 두 시간 잤어요. 끝나고 나서야 피곤한 걸 알겠더라고요.”

월드스타 로베르토 볼레는 물론 엄재용, 이현준 등 하늘 같은 선배와의 경쟁구도인지라 부담감은 더했다. 하지만 선배들 의식할 겨를도 없이 역할에 빠져들었다. 연습기간 내내 스스로를 오네긴으로 세팅해 지낸 덕분에 감정 연기도 잘 소화할 수 있었다고. “저도 살면서 이런저런 일도 겪고, 나쁜 여자도 만나보고, 비슷한 경험도 있긴 있었죠.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전부터 ‘나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도 많이 했었고요. 발레를 하면서 가장 매력을 느낀 작품이에요. 드라마 발레는 발레 문법에서 벗어나 일상이나 연극에서 쓰일 법한, 관객이 쉽게 이해할 만한 동작을 사용하거든요. 관객도 금세 몰입하는 점이 춤추는 입장에서도 좋았어요.”

선망의 대상이던 볼레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볼레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혀 달랐다. 한발 내디딜 때마다 배울 것 투성이였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 배웠던 것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경험이었어요. 제 공연 영상을 보니 부끄럽던데요. 만약 기회가 와서 다시 하게 된다면 저도 더 완벽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디스 이즈 모던’ 공식포스터에 쓰인 사진

강한 카리스마에 감정 연기도 탁월
유니버설발레단의 ‘디스 이즈 모던’은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현대 발레 거장의 공연권을 획득해 한국 발레 레퍼토리를 풍성하게 하는 데 기여해 왔다. 올해는 한스 반 마넨의 ‘블랙 케이크’, 나초 두아토의 ‘두엔데’, 이어리 킬리안의 ‘프티 모르’와 ‘젝스 탄체’ 등 네 작품으로 밀도 있는 무대를 엮는다. 이동탁과 후왕 젠·이승현·강민우 등 ‘미남 발레리노’ 4인방이 관객몰이에 나섰다. 이동탁은 이 중 ‘두엔데’와 ‘프티 모르’에 출연한다.

특히 ‘프티 모르’는 무용수의 몸을 매력적으로 보여주기로 유명하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바탕으로 각 6명의 남녀 무용수가 의상과 장식을 배제한 채 온전히 몸짓만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세계 현대무용의 나침반’이라 불리는 이어리 킬리안은 극적인 작업보다 춤의 움직임을 강조해 춤 자체로 인간 사이의 관계와 느낌을 담아내는데, ‘프티 모르’에서는 그의 세련된 안무와 고요한 에너지, 기품 있는 섹시함이 두드러진다. 이미 두 차례 국내 무대에서 큰 호응을 받은 모던 발레의 고전이다.

“모던 발레를 낯설어들 하시는데, 클래식보다 오히려 지루하지 않고 이해하기도 더 쉬워요. 사랑을 표현한다면 클래식에선 스토리를 만들죠. 여자와 남자가 있고, 무슨 일이 있어서 사랑이 이뤄지거나 안 이뤄지는데, 모던은 사랑 자체에 집중하는 거죠. 아픈 사랑이라면 스토리 없이 그 느낌 그대로를 보여주는, 감성적이기보단 직설적인 표현으로 보시면 돼요. ‘프티 모르’의 경우는 성에 관한 표현이고, ‘작은 죽음’이란 제목도 오르가슴을 의미한다고 들었어요. 손가락 끝에 펜싱 칼을 올려놓고 시작되는데, 거기서부터 남자와 여자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나타내는 거죠. 보이는 그대로 빠져든다면 재미있으실 것 같아요.”

관객 입장에선 더 쉬울 거라지만, 몸으로 구현하는 입장에선 정반대다. 매일 연습하는 클래식의 동작 틀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불편할 수밖에 없다. “리프트 하나를 하더라도 꼬아서 하고 뒤집어서 하고, 정해진 틀을 깨는 것이 아무래도 힘들어요. 하지만 연습 때 힘들던 것을 무대에서 잊게 만드는 성취감이 크죠. 클래식은 주역이 있고 그 밑에 솔리스트, 코르 드 발레가 있는데 모던은 서열 없이 다 같이 무대를 채워가는 느낌도 좋고요. 움직임도 클래식에 남녀 구분의 틀이 있다면 모던에서는 서로 교차되면서 남자무용수 움직임이 새롭게 보이고 나도 모르던 끼를 발견하는 계기도 됩니다.”

‘프티 모르’는 의상과 소품을 최소화하고 무용수의 몸짓만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감각적인 작품.

왕자보다 전사가 어울리는 외모
사실 그의 외모는 전형적인 발레리노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강인한 인상에 포항에서 나고 자라 살짝 경상도 억양이 섞인 말투까지 더해 무뚝뚝한 운동선수 이미지가 강하다. 축구 심판인 아버지의 권유로 꽤 오래 축구를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들려준 음악의 힘이 더 셌다. “어렸을 때는 왜소한 편이라 남자들끼리 부딪치는 게 싫었어요. 어머니가 팝송을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죠. 그런데 마이클 잭슨 음악을 들으면 신나서 춤을 따라 추게 되더라고요.”

초등 3학년 때 마이클 잭슨의 다리 찢는 춤을 잘 추려고 등록한 발레학원에서 소년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돈키호테’ 영상 속으로 그만 빨려들어갔다. 바로 그 ‘돈키호테’의 바질 솔로로 대회에 나가 인정받으면서 무용수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연습실에서 땀 흘리고 차츰 잘하는 것도 생기는 과정이 어린 나이에도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것 같아요. 음악도 좋아해서 피아노를 6년간 쳤지만 그거랑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죠.”

포항에 딱 하나 있던 발레학원에선 금세 배움의 한계에 도달했다. 레슨을 위해 주말마다 서울을 오가고 방학 때는 혼자 고시원에 살면서 분식집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런 생활이 힘겨워 한때 발레를 포기하기도 했다. “발레가 아무리 좋아도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못 하니 사춘기 때 폭발한 거죠. 중3땐가 한 1년간 친구들과 어울려 술담배 같은 나쁜 짓도 해보고…. 저흰 워낙 시골이라 다 일찍 일찍 시작합니다(웃음). 하지만 쉬면서도 발레가 늘 그리웠어요.”

발레도 좋지만 해볼 건 다 해봐야 한다는 주의인 그는 연습벌레 스타일은 아니다. 짧은 시간에 집중하고 남는 시간에는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발레를 잘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털어놓는다. 성공한 무용수들은 아침에 연습실 문을 따고 들어가 밤에 잠그고 나온다더라는 얘기에도 “그렇게 절대 못하는데”라며 웃어넘긴다.

“10시간의 에너지를 1시간에 다 쏟아붓는 스타일이에요. 춤출 때 누가 지적해도 못 듣고 지나갈 정도로 심취하죠. 제일 좋아하는 것을 직업 삼다 보니 남들이 볼 때는 좋아하면서 무슨 스트레스냐고 하겠지만, 좋아하는 게 잘 안 될 때 오는 스트레스는 엄청나거든요. 좋아하니까 더 잘하고 싶고, 안 되면 좌절감이 커요. 그럴 땐 과감하게 한 템포 쉬었다 돌아오면 오히려 제 발밑이 보이더라고요.”

마이클 잭슨 덕에 발레 시작
주로 왕자가 주인공인 발레 세계에서 개성적인 외모는 스스로 불리하다고 평가하지만, 반전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매력으로 이용해 극복 중이다. “그렇게 안 생겼는데 섬세한 면도 있다는 걸 보여드려야죠. 왕자가 어렵긴 해요. 부드러운 캐릭터를 표현하기가요. 남성미 넘치는 역할이 낫죠. ‘심청’ 선장이나 오네긴을 할 때 가장 좋았어요. ‘라 바야데르’의 전사 솔라르도 꼭 해보고 싶은 역할입니다.”

선화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2011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코르 드 발레(군무 무용수)로 입단한 그는 단박에 돈키호테 주역을 맡아 주목을 받으며 드미 솔리스트로 승급했고, 2012년 솔리스트, 올해는 20대의 꿈이라던 수석무용수의 자리까지 고속 질주했다. 2011년 서울국제무용콩쿠르 1위, 2012년 한국발레협회 신인상 등 공인된 차세대 무용수로서의 입지도 굳혔다. “승급 소식에 몸둘 바를 몰랐어요. 부끄러운 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제 안에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수석무용수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겉으로 이뤘다고 보일지 몰라도 저는 아직 꿈을 이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이 아니라 ‘부끄럽지 않은 수석무용수가 되겠다’는 소심한 목표를 겸손하게 얘기하는 그에게서 애초에 예상했던 씩씩함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연습실 바를 잡고 서자 강렬한 눈빛을 장착하고 말벅지로 점프하는 무대 위 야생마로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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