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피로스의 승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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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호 29면

1955년 제임스 딘이 출연했던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선 ‘치킨게임’이 등장한다. 17세 도시 소년 짐과 동네 불량배 버즈가 서로 마주보고 상대방을 향해 자동차로 돌진하는 대결이다. 이 무의미하고 우둔한 게임이 2013년 미국 정치에서 고스란히 재연됐다. 주인공은 17세 소년이 아니라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다. 베이너는 여론 악화에다 당 중진급들의 중재 등으로 정치적 명분을 잃자 막판에 먼저 핸들을 돌림으로써 ‘치킨(겁쟁이를 비유하는 말)’이 됐다. 민주·공화 양당은 16일간의 연방정부 ‘셧다운(부분 폐쇄)’에서 사생결단의 자존심 대결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의 ‘국가부도’라는 자멸적인 결과가 우려됐던 이번 사태는 1962년 10월 14일간 계속됐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엔 ‘상호 확증 파괴’라는 파멸적인 비극을 유발할 수 있는 핵전쟁 우려 때문에 전 세계가 공포에 떨었다.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하려 했던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과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벌였던 ‘벼랑 끝 대치’는 세 불리를 느낀 흐루쇼프의 선박 회항 조치로 끝났다. 겉보기엔 배짱이 두둑한 젊은 대통령 케네디의 승리였다. 하지만 케네디는 그 대가로 소련과 국경을 맞댄 터키 등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철수하기로 약속했다. 전략적으로 누가 더 손해인지 알 수 없는 협상이었다. 이번 셧다운 사태도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서구 언론은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 역사에 나오는 ‘피로스의 승리’에 빗댔다. 피로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6촌으로 에페이로스 왕(기원전 306~302년, 기원전 297~272년)과 마케도니아 왕(기원전 288~284년, 기원전 273~272년)을 각각 지냈다. 왕위에 있을 때 초기 로마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특히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헤라클레아에서 기원전 280년, 아스쿨룸에서 기원전 279년 각각 전투를 벌여 로마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희생도 컸다. 아스쿨룸 전투 직후 누군가가 승리를 축하하자 그는 “이런 승리를 한 번만 더 했다가는 완전히 파멸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은 전한다. 그와 함께 참전한 절친한 친구, 믿음직한 장수들을 거의 다 잃고 더 이상 병사를 모병하거나 용병을 구할 여력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바마는 국가 부도를 막고 공화당을 상대로 정치적 승리를 얻은 것으로 평가받지만 그야말로 ‘피로스의 승리’나 다름없다. 특히 ‘유일패권’ 미국의 국가 브랜드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의회와 행정부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대의제’로 대표되는 미국식 민주주의도 도마에 올랐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기본기가 없으면 이렇게 ‘파당 정치’로 변질할 수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줬으니 말이다.

현행 미국 정치체제는 헌법 기초를 주도해 ‘헌법의 아버지’로 불린 제임스 매디슨의 정치철학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다. 견제와 균형, 대의제는 매디슨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제4대 대통령(1809~1817)으로 재임할 때 영국과의 전쟁을 주도해 국가 정체성을 다진 인물로도 통한다. 당시 워싱턴 DC를 점령한 영국군이 불태운 대통령 관저를 흰색의 백악관으로 재건했다. 오뚝이 같은 정신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정치 시스템도 이렇게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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