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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칼럼] 일본 외교관 쫓아내는 나리님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5호 30면

코끼리를 몰고 알프스를 넘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로마의 청년 장군 스키피오가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에서 맞붙는다. 역사에 길이 남은 ‘자마 전투’다. 싸움에 앞서 한니발은 척후병 3명을 보냈으나 모두 잡힌다. 스키피오는 묻는다. “임무가 뭐냐”고. 죽을 각오를 한 이들은 정탐이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이틀간 로마군 진영 모두를 보여준 뒤 풀어준다. 무사 귀환한 이들은 스키피오의 언행을 낱낱이 보고했다. 묵묵히 들은 한니발은 뭔가 크게 느꼈는지 곧 로마에 회담을 제의한다. 하나 협상은 결렬되고 전투가 벌어진다. 결과는 모든 것을 보여준 스키피오의 승리였다.

지난 17일 서울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문위) 문화재청 국정감사장에선 작은 소동이 있었다. 일본 대사관 직원이 방청하러 왔다 여야 합의로 쫓겨난 것이다. 이날 국감에선 일본대사관 신축허가 문제가 논의될 가능성이 커 이를 참관하러 왔을 게 분명했다. 신학용 교문위 위원장의 설명은 이랬다. “일본대사관 직원의 방청은 전례가 없으므로 여야 간사 간 협의에 따라 취소했다”고.

전례 없는 일이란 게 표면상 이유였지만 여야는 일본대사관 신축 문제와 관련해 정탐하러 온 걸로 여긴 게 틀림없다.

경복궁 앞 일본대사관은 1976년 세운 건물이 노후화됐다며 지난해 신축을 추진했으나 허가를 얻지 못했다. 경복궁 100m 이내여서 문화재청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지난해 심사에서 부결됐다. “경복궁 역사문화환경 훼손”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이 결정은 1년 만에 뒤집어져 올 7월 재심의에선 통과됐다. 문화재청의 번복을 두고 일본의 압력설이 난무하는 등 여간 시끄럽지 않다.

하나 따져보자. 외국대사관 직원들의 국감 방청이 이례적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가. 일본 대사관 측은 “지금까지 직원들이 여러 번 국감을 방청해 왔다”고 설명한다. 자기가 모르면 ‘전례 없는 일’이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해외에 파견된 외교관의 일이 뭔가. 주재국 의회의 공개 회의에 가 논의 내용을 듣고 보고하는 것만큼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 있는지. 일본 내 한국 외교관들도 한·일 간 민감한 사안일수록 기를 쓰고 일본 국회에 가 회의를 방청한다. 이런 한국 외교관이 염탐꾼으로 몰려 문전박대당해도 좋은가.

국감 회의는 공개가 원칙이다. 군사기밀 등 극도로 민감한 사안을 다룰 경우 위원회 의결로 달리 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공개냐 비공개냐를 정하는 것이지 소란을 피우거나 위험인물이 아닌 한 특정인을 출입금지시켰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문화재청 국감에서 일반인이 알면 큰일 날 극비사항이라도 논의됐는가.

더 한심한 건 교문위 조치가 아무런 실익이 없다는 거다. 한·일 관계 악화를 무릅쓰면서 일본 외교관을 쫓아내봤자 문화재청 국감 내용은 글자 한 자 안 틀리고 국회 웹사이트에 뜨게 돼 있다.

제대로 된 국회였다면 일본 대사관 관계자를 불러 이들의 의견도 경청해야 했다. 공정한 판단을 하려면 다른 의견도 듣는 게 옳다. 위안부, 과거사 등 한·일 간에 얼굴 붉힐 일이 많은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건물 신축 문제에 반일 감정을 실어 대응하면 너무 옹졸하지 않나. 그리고 일본 대사관 직원이 국감장에 앉아 신축 불허 입장도 들어야 한국 측 논리가 일본에 전달될 것 아닌가. 저쪽 이야기를 듣기는커녕 이쪽 논리마저 차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면서 한·일간 관계가 소원해져 큰일이라고 떠들어봐야 말짱 헛일이다. 얻는 것 없이 불필요하게 일본의 감정을 자극한들 무슨 실익이 있나.

설사 일본 국회가 한국 외교관을 터무니없는 이유로 쫓아내도 우린 그러지 말자. 진중하고 공평무사하게 처신해 일본인들의 존경심을 끌어내는 게 진실한 극일(克日)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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