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철수의 종속변수? 손학규를 우습게 보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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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민주당 고문이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의 동아시아미래재단 사무실에서 화성갑 보궐선거에 불출마한 이유와 향후 행보에 대해 밝히고 있다. 손 고문은 이날 인터뷰에서 ‘자숙’과 ‘꿈’을 동시에 거론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명당(明堂)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손학규 민주당 고문의 개인사무실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동일빌딩 7층에 있다. 한쪽 면 전체가 유리벽이다. 창문 너머로 경복궁과 북악산, 북악산 중턱에 있는 청와대의 푸른 기와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고궁은 굽어 보이고, 눈 높이는 청와대와 맞춰지도록 돼 있다. 16일 오후 이 사무실에서 지난달 말 독일에서 돌아온 손 고문을 만났다. 자연스레 ‘푸른 지붕’이 화제에 올랐다.

 - 매일 저 자리 앉아서 저기(청와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허허허. 그런 건 함부로 얘기하는 게 아니지.”

 그는 창가로 다가가 북악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저 북악산 중턱에 바위들이 있잖아요. 내가 고등학교(경기고) 다닐 때 효자동에 살았는데 2·3학년 때 한 달에 한 번은 저녁에 북악산에 올라갔어. 소주 한 병에 라면땅 하나 사서 올라가 거기 앉으면 남대문까지 쭉 보였지.”

 - 경기고 다닐 때부터 권력 의지를 키운 건가.

 “글쎄 그런 얘기는 하는 게 아니고. 허허허. 올라가서 서울 시내의 불빛을 보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했지.”

 이곳에서 손 고문은 지난해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을 치렀다. 경선에 패배하고, 당이 대선에서 지자 그는 올 1월 독일로 떠났다. 8개월 만에 귀국한 그의 첫 정치적 선택은 화성갑 보궐선거 불출마였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두 차례나 그를 찾아 설득했고, 전화로도 읍소하다시피 했지만 거절했다. 지금은 ‘자숙’(自肅)할 때란 이유에서였다.

 - 2008년 대선 패배 이후 강원도 춘천에서 닭과 오골계를 치며 칩거할 때도 자숙 얘기를 했다. 당시 수원 장안 재선거 출마 요구도 반성이 안 끝났다면서 거절했다. ‘자숙 정치’를 하는 것 같다.

 “죄가 많은 사람이니까….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주고 좌절을 안겼으니 죄인임엔 틀림없다.”

 - 불출마 이유 중 하나로 ‘대선 패배의 책임’을 들었는데, 손 고문이 대선 패배에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나.

 “한마디로 얘기하면 손학규가 보궐선거에 출마할 때 사람들이 보기에 괜찮은 그림일까를 생각했다. 과연 일반 국민 눈으로 봤을 때 보기 좋을까…. 아닐 거 같았다. 사실 삼고초려(三顧草廬)를 거절한 건 역사에도 없는 얘기지.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삼고초려했다는 얘기는 ‘받아들인다, 받아들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만큼 사정이 어려우니 체면 불구하고 (김한길 대표가) 그랬을 텐데, 그렇게 정성을 다했으면 받는 게 예의이고, 나도 사람인지라 내가 나서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순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 국민, 보통사람들이 보기엔 아름다워 보일 것 같지 않았다. 워낙 국민이 정치를 보는 눈이 부정적이다. 당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는 진정성을 갖고 출마해도 국민의 눈에는 욕심같이 보이고. 또 하나의 ‘안철수 현상’을 보태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아이구, 대선 나가겠다고 한 지 1년도 안 돼 무슨 국회의원 나오고 그러느냐’고 말이지.”

 - 또 하나의 안철수 현상? 안철수 의원이 올해 노원병에 출마한 걸 뜻하나.

 “아니 아니. 안철수 현상은 기성 정치에 대한 반사 작용으로 제3의 인물과 정치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 불신을 더 깊게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내가 대선 패배를 얘기한 건 어쨌거나 경선에서 패했지만 모든 과정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다.”

 - 대선 1년도 안 돼 국회의원 나오는 게 욕심으로 비친다고 했는데, 안 의원은 출마하지 않았나.

 “그건 뭐, 모든 경우에 대통령 선거 나왔던 사람이 의원 나가면 안 되는 공식이 있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상황이 있고. 안철수 의원은 정치에 새로 입문해서 국회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고,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될 듯하다.”

 그와 안철수 의원의 연대설은 정가의 이슈 중 하나다. 그러나 신당을 추진하는 안 의원과 민주당 대표를 두 번 지내고 당적도 민주당에 두고 있는 손 고문이 어떻게 연대할지 밑그림이 나온 것은 없다. 두 사람이 서로 연대하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도 아니다. 물론 양측은 ‘연대 안 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 연대설에 대한 입장은 뭔가.

 “연대설이 나왔을 때 ‘‘안철수 현상’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좌절에 대한 반사 작용인 만큼 안철수 의원이 표방하는 새 정치의 내용을 충실히 채우고 국민에게 좋은 정치를 보여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게 정답이다.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다.”

 - 안철수 현상에 대한 평가나 정의를 물은 게 아니고 손 고문이 그와 연대할 건지 안 할 건지가 궁금하다. 손잡고 같이할 수 있나.

 “안 의원이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하면 그게 국민 여망에 부응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게 그거다.”

 - 안 의원은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다. 손 고문이 말한 국민 여망에 부응하는 것에 신당 창당도 포함되나.

손학규 민주당 고문이 창 쪽을 가리키며 북악산과 청와대가 보이는 창밖의 전경을 설명하고 있다. 뒤의 액자(왼쪽)엔 좌우명인 ‘수처작주(隨處作主)’가 쓰여 있다. ‘어디에 있건 주인이 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안 의원 및 안 의원과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창당 여부와 시기·방식을 전략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내가 왜 안 의원을 평가해야 하나. 나는 지금 정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게 할 일이다. 대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야 할지 독일에서의 경험을 참고 삼아 생각하고 공부하려 한다. 지금은 정치에 나서는 것 자체가 그렇게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란 판단에서 불출마도 결정한 거니까. 안 의원 관계는 그런 차원에서 보면 된다.”

 - 그래도 일반 국민 입장에선 연대 여부가 관심이라 또 물어보겠는데….

 “하하하. 언론의 관심이지 무슨 일반 국민이….”

 - 만약 안철수 신당이 나오면 같이할 가능성이 있나.

 “하하 참 나…. 손학규를 어떻게 보고….”

 연대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직설적인 발언이다. 말 그대로라면 어떻든 신당합류는 없다는 뜻이다.

 - 지금 민주당은 야당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나.

 “어려운 질문이다. 그런데 야당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로 모아가는 정치가 됐으면 좋겠다. 분열과 간극이 더욱 심해져 어디까지 갈지 모를 정도다. 독일 총선을 지켜보니 거기도 여야 대립이 있고 논박이 있고 네거티브가 있지만 악다구니는 없더라. 통합의 정치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강자가 보여준 관용의 정치가 바탕이었다. 통합의 전제는 관용이다. 관용은 강자나 우월한 위치의 세력이 먼저 행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야당 대표가 길거리에 앉아 노숙 투쟁을 하면 어느 정도는 수용하고 받아주는 모양이라도 취해야 한다. 야당을 한쪽으로 몰아가 야당이 풀고 나오려고 해도 나올 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보여지도록 하는 그런 게 안타깝다.”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얘기로 돌아갈 수 있는데, 여권에선 정부 출범 때 야당이 먼저 조직개편도 협조 안 해 줬고,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대선 정당성을 훼손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약자의 경우 강자 입장에서 무리하다고 생각되는 요구를 한다. 여당에선 (야권이) 국정원 댓글로 시비를 걸어 선거를 무효화하려 하느냐고 하지만 분명히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 특히 정보기관의 공무원이 대선 때 댓글을 달았다는 점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명백한 잘못에 대해 권력을 쥔 쪽에서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대선 무효 시도라고 하면 이건 지레 겁먹는 것이거나 호도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국정원은) 으레 그런 것 아니냐’는 인식이다. 많은 사람, 특히 여권에선 ‘이거 뭐 국정원에서 국내 담당이 당연히 하는 거지’라고 기정사실화한다. 지금 우리 정치문화의 깊은 뿌리에 아직까지도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가 있다. 이게 문제의 본질이다. 그런 상태에선 야당은 선명하게 싸워야 한다. 선명성에서 주도권을 잃으면 야당 내에서뿐만 아니라 야권 전체에서 정통성을 잃어버린다.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 민주당은 여당보다는 약자이긴 하지만 의원 127명을 가진 약자다. 경제를 포함한 모든 의제 가운데 ‘댓글’을 투쟁의 1순위로 삼는 건 우선순위를 잘 정한 건가.

 “민주당이 사회·경제적 책임을 방기해선 안 되지만 이런 소재가 있는데 야당이 문제를 제기하고 규명하는 건 당연한 의무 아닌가. 왜 민생에 주력하지 않느냐며 정쟁으로 보는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안 돼 있는 것이다.”

 손 고문은 2002년 대선 이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인 약 10년 전부터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정치인이다. 그러나 정작 대선 본선에는 한 번도 나서보지 못했다. 매번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다가 2007년엔 정동영, 2012년엔 문재인 후보에게 뒤집기 한판을 당했다.

 - 그동안 대한민국을 맡으면 어떻게 해보겠다는 구상을 많이 했을 텐데, 두 번의 기회를 놓쳤다. 대선 후보가 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금 뭐 그런 얘기를…. 패배 원인, 이런 덴 관심이 실제로 없다. 독일 가 있는 동안에도 그런 걸 생각한 적은 없다.”

 - 지금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점이란 평가가 있다.

 “어렵긴 뭐가 어렵나. 남들 보기에 그렇지. 독일로 떠날 때 욕심 버리자고 주문 외우듯이 외우고 있었으니까 힘들 게 없다. 돌아갈 때 뭘 쥐고 돌아갈까 고민한 게 아니니까.”

 과연 그에게 세 번째 기회는 올 것인가. 민주당도, 새누리당도, 손학규 자신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무욕’(無慾)의 바탕 위에서 일단은 ‘자숙 정치’를 하면서 준비는 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지금 한국사회는 1987년 민주화 이래 또 하나의 새로운 변혁기에 들어섰다. 복지국가의 완성과 통일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놓고 변화를 겪고 있는 만큼 이 변화를 역사 속에 수용하기 위해 어떤 그림을 그릴지를 고민하는 게 내가 어떤 위치에 있건 해야 할 일이다. 다만 내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사회가 손학규를 필요로 할지, 그건 시대가 정하고 하늘이 정해 주는 거니까.”

 그의 사무실 문 옆에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어디에 있건 주인이 되라’는 뜻이었다.

 - 결국 ‘수처작주’란 뜻인가.

 “그렇지.”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부연했다.

 “아까 안철수 신당을 가지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지만 손학규가 종속변수인가? 나는 내 길을 가는 것이다. 손학규가 생각하는 것은 훨씬 더 원대한 꿈이다. 그저 어디서 자리 하나 차지하고 세를 이용해서 유리한 여건을 만들고 하는 건 내 머릿속에는 없다. 손학규 우습게 보지 말라 이 얘기다.”

글=강민석·채병건·이윤석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람 속으로] 출마 대신 '자숙 정치' 손학규 민주당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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