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으로 밀려나는 영전 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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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3일 동독 공산당 제 1서기 「발터·울브리히트」가 사임하여 2차 전후 냉전의 최선두 주자가 또 하나 탈락됐다.
「울브리히트」의 사임 이유는 단순히 78세의 고령 때문이라고 밝혀졌으나 강경론자인 그의 정치 일선에서의 퇴진은 70년 8월부터 비롯된 동서 해빙의 제1, 2관문인 독소조약·독파조약체결에 이어 제 3관문으로의 접근을 기대하게 해준다.
46년 소련군의 독일 점령과 함께 줄곧 동독에 군림해온 「울브리히트」는 동구권에서 가장 강경한 「스탈린」주의자로 자처해왔다.
68년 「체코」에 자유화 운동이 일 때 동독 내에 파급될까 두려워「바르샤바」군을 끌어들일 것을 주창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소련으로서는 「울브리히트」의 이러한 강경 노선을 이용하여 자기네 입장을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으나, 서독과의 불가침조약을 기점으로 한 동서해빙 정책수행에는 오히려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소련의 대서방 접근에 대한 「울브리히트」의 거센 반발은 국내에서도 반대파 무마에 애를 먹던 소련 지도부를 궁지에 몰아 넣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울브리히트」의 사임의주요 이유의 하나도 대소관계의 악화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소련이「울브리히트」의 퇴진을 정면으로 요구할 수 는 없으나 은근한 입김을 주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엿보이며 「올브리히트」자신이 소련의 입김이 세어지기 전에 선수를 쳐 물러났으리라는 관측이다.
이는「울브리히트」의 뒤를 이어 새로운 당 지도자로 「호네커」가 임명된 데서 엿볼 수 있다.「호네커」도 강경파로 알려져 왔다. 소련으로서는 「호네커」보다 온건론자인 현 수상 「빌리·슈토프」가 더욱 바람직했을 것이다.
「울브리히트」로서는 이러한 소련의 태도가 표면화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자신의 정책노선의 변질을 막을 속셈이었던 듯하다.
새로운 동독 공산당 지도부가 「울브리히트」노선에 당분간 충실할 것은 예상되나, 동구권에서 최대의 강경론자였던 그의 퇴진은 결국 동독의 대서구정책, 특히 현안의 「베를린」문제를 비롯한 대서독관계 개선에 전환점을 마련해준 것만은 틀림없다. <김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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