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인천 상륙(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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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영흥도 첩보전(2)

<클라크 첩보반 4명 활약>
「맥아더」사령부 정보 부에서 특파한 「유진·프랭클린·클라크」해군 대위의 첩보 반이 영흥도에서 인천 상륙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해군 첩보대의 활약과 도움 덕분이었다.
이제 서야 밝혀진 일이지만 사실 「맥」 사령부는 한국 해군 첩보 대에서 수집한 인천 상륙에 관한 정보를 직접 확인, 입수하기 위해 「클라크」첩보 반을 파견했던 것이다. 이때까지 우리 해군 정보는 무전기와 암호 등의 문제로 몇 단계 「채널」을 거쳐 「맥」 사령부에 전달됐었다.
영흥도에 상륙한 「클라크」첩보 반은 무전 사와 2명의 한국인을 합해 모두 4명뿐이었다. 한국인 연정 씨와 이 모씨는 영관 급 한국 해군 장교였지만 어떤 사정으로 군 적을 떠난 후 일본에 건너가 미 극동사 정보 부에 관계했다가 「클라크」 정보 반에 끼게 된 것이다.
미군 관계자료에 나오는 2명의 한국인 통역이란 이들을 지칭한 것이다. 육군 소령 복장을 한 기뢰 전문가도 처음에는 동반했지만, 곧 섬을 떠났다.
이들 두 명의 「클라크」 첩보 반이 2주일 동안 동경에 타전한 극비 정보는 실은 대부분 우리 해군 첩보대가 수집한 것이었다. 물론 「클라크」 첩보 반도 간혹 독자적인 첩보 수집을 했지만,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이 직접 인솔하는 17명의 해군 첩보 대는 이미 8월23일에 영흥도에 거점을 확보하고 정보 수집을 하고 있었다.

<손 제독, 덕적도 상륙 제안>
영흥도의 우리 해군 첩보대 활동에 관한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한국 정부와 해군도 「맥아더」 원수의 집념 못지 않게 인천 상륙의 열의에 불타있어 때로는 미군을 이 작전으로 유인케 하는 정보를 조작, 전달한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이 증언으로 상륙에 앞서 인천은 물론 서울 주변의 적정을 007수법으로 낱낱이 탐지해 낸 사실도 드러나고 있다.
▲함명수씨(당시 해본 정보국장=소령·예비역해군중장·현 사업·45)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맥아더」원수 못지 않게 상륙 지점은 꼭 인천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물론 이승만 대통령께서도 김일성이가 연말이나 연시 「메시지」는 서울서 발표 못하도록 수도만은 속히 탈환해야한다고 했지요. 손 제독은 「맥」 사령부가 상륙 지점을 인천으로 정하도록 유인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유리한 정보를 제공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인천의 적정을 빼내기 위해서는 인천 앞에 노점을 마련해야하므로 손 제독은 미군 고문 「루시」대령에게 덕적도에 상륙하겠다고 했어요. 「루시」대령은 서해안 영 함대 사령관에 건의해서 승낙을 받았어요. 이래서 서해 해상 전투사령관 이희정 중령에게 상륙 전을 감행하도록 해놓고 우리 해군 첩보 대는 8월17일에 부산을 떠났습니다.

<6·25 전 공작원과 접선>
나는 8월13일에 손 제독으로부터 극비 지시를 받고 해군 특수 첩보대룰 구성했어요. 해본 작전 국에 근무하는 김순기 중위·장정택·임병래 소위를 불러서 취지를 설명하고 각자가 가장 신임할 수 있는 병조장 이상의 고급 하사관 3∼5명씩을 뽑아서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이렇게 해서 내가 지휘관이 된 17명의 해군 특수대가 편성됐습니다. 17일 밤에 자갈치 시장에 모여 부두에 숨겨뒀던 백구 호를 타고 영흥도로 떠났지요. 떠난 지 한참 후에 대원들에게 목적지를 알렸어요. 지휘 「채널」을 통해 이희정 사령관에게 해군 보조 선이 영흥도에 들어간다는 연락을 취했구요.
이 사령관이 영흥도를 탈환한 바로 다음날인 23일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올라가는 대로 곧 「캠프」를 치고 인천 지방에 있던 6·25 전의 우리 공작원들과의 접선을 시도했어요. 인천에는 원래 「어깨」지만 우리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김 모와 권 모가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후퇴 후에도 그대로 인천에 남아있었어요. 밤에 임병래 소위와 몇 하사관을 조각배에 태워 인천으로 잠입시켜 김과 권을 만나도록 했습니다. 임 소위는 바로 권과 접촉하고 우선 권 부부를 데리고 들어왔어요.
밤새도록 조사해보니까 권이 그 동안 적치 하에서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다른 공작원 전은 현재 내무서원으로 복무하고 있지만, 그도 변절은 안 했다는 거예요.

<통행증 얻어 인천을 왕래>
다음날 부인은 인질로 그대로 두고 권을 인천으로 보내 김을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그 날 밤에 김은 총을 멘 채 내무서원 복장으로 부인과 함께 권을 따라 건너왔어요. 김도 조사해보니 사상엔 변함이 없고, 강제로 괴뢰 내무서원이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김을 통해 우리 대원들도 통행증을 받아 가지고 자유롭게 인천을 왕래하게 됐어요. 김과 권은 낮에는 인천에서 여러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대로 근무하고 밤에는 우리 대원들과 만나 정보를 전했어요. 김순기 중위는 아예 인천에 머무르면서 첩보 활동을 지휘했고, 서울까지 공작임무를 확대했어요. 이렇게 해서 인천에 관한 필요 정보는 3∼4일 내에 전부 탐지했어요.
우리가 수집한 정보란 인천의 적병력·보급관계·기뢰 부설 상황·상륙 지점의 지형과 암벽의 높이 등이었습니다. 기뢰 수송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밤에는 공작원들을 도로 보수, 노무자로 가장시켜 경인가도서 적 「트럭」L왕래를 탐지하기도 했지요. 「블루·비치」와 「그린·비치」의 암벽 높이는 공작원들이 자기 키를 기준으로 해서 상륙용 사닥다리의 높이를 측정하기도 했구요. 1주일쯤 지나서는 김과 권 이외에도 상당수의 우리 해군 정보국의 전 공작원을 찾아냈고, 또 새 공작원도 포섭했어요.
내가 떠날 때 손원일 제독은 모든 정보는 미군으로 하여금 인천에 상륙 전을 전개케 하도록 유리하게 보고하라고 했어요. 나는 이것이 어떤 뜻인가를 곧 알았지요. 그래서 적 병력이 실제로 5천이면 3천 정도로 하고 다른 정보도 이런 식으로 가감했어요.
요는 인천의 적 방비가 허술하다는 방향으로 정보를 조절한 거지요. 그러나 암벽의 높이나 지형 같은 정보는 철저히 정확을 기했어요. 우리가 보고한 정보는 해본을 통해 미 극동 해군 사로 가서「맥」 사령부로 전달됐습니다. 「맥」 사령부에서는 이런 중대한 정보를 받아 보니까 중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자기들의 암호와 난수표를 이용해서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미군 암호나 난수표도 모를 뿐더러 이를 타전할 무전기가 없었습니다. 9월1일에 이성호 중령의 703 함정이 「클라크」 대위 일행을 태우고 노흥도에 들어옵디다.

<타전한 정보 2시내 효력>
「클라크」 대위는 우리와 협조하면서 우리가 수집한 정보를 직접 「맥」 사령부에 타전하더군요. 정보 처리가 어떻게 신속한지 한 예를 들면 우리가 수집한 군사 목표에 관한 정보가 「클라크」 대위에 의해 타전되면 2시간 이내에 항모에서 함재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합디다.
9월10일께가 되니까 인천 상륙이 박두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더군요. 미영 군함이 떼를 지어 몰려와 월미도에 함포 사격을 가하고 폭격도 날로 심해졌으니깐요. 이제 우리 소원이 이루어지나 보다 생각하니, 정말 기쁘고 감개무량이더군요.
9월13일에 「클라크」 대위는 임무를 마치고 섬을 떠났고, 우리 첩보대도 이제 전진 기지를 옮길 생각으로 모든 문서를 불사르고 14일 새벽에 출발 준비를 했습니다. 이 마지막 판에 옆 섬인 대부도로부터 건너온 적 부대의 기습을 받고 2명의 대원과 공작원 1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나는 이 첩보 활동으로 미국 은성 무공훈장을 받았어요. 하지만 실제 일은 하사관 대원들과 공작원들이 무진 고생을 하며 다한 셈이지요.』
▲장정택씨(당시 해본 정보국 근무=소위·현 국방부 특검단 근무=대령·46)『8월13일에 함명수 국장이 자기와 함께 죽음을 각오한 첩보 공작에 나가자고 해요.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고 해서 부모님은 물론 한참 열애중인 여인에게도 비밀로 하고 떠났지요.

<첩보공작에 애인도 잃고>
부모님은 내가 3일째 집에 안 들어오니까 해본으로 찾아가 전사한 것을 숨기는 게 아니냐고 통곡을 하셨다는 군요. 이 때문에 애인과는 영 절교가 됐구요.
우리 첩보 대는 김순기 중위·임병래 소위·나 이렇게 3조로 나뉘어 공작원들과 접촉하며 활동을 벌였어요. 김 중위는 인천에 상주하다시피 했고 임 소위와 나는 드나들면서 본부와 연락을 했어요. 공작원들을 해변에 보내 어느 지점은 수렁이 어느 정도 빠지고 부두 암벽의 높이는 얼마인가를 모두 조사시켰습니다.
서울에 있는 공작원과도 접선이 잘돼서 서울 적정도 많이 탐지했어요. 「클라크」 대위가 와서 정보를 타전할 때는 내가 통역도 해주었지요. 우리가 수집한 모든 정보는 함명수 대장이 일단「체크」해서 내주면 「클라크」 대위가 보고 통신사에게 넘겨주곤 했습니다.』다음은 유일한 민간인이며 최 연소자로 이 첩보 대에 참가했던 증인의 이야기.
▲김남규씨(당시 해본 정보국 군속·현 사업·36)『나는 그때 16세의 중학생이었는데 학도 의용군에 나갔다가 해본 정보국에서 군속 자격으로 근무했어요. 함명수 국장이 나룰 몹시 귀여워했는데 하루는 어디로 특수 임무를 띠고 간다기에 나도 떼를 쓰다시피 해서 겨우 한몫 끼였어요.

<현지 청년 우리 활동 도와>
물론 함 소령은 처음에는 말렸지요. 이때 같이 간 사병으로는 정성권·박원풍·차성환 (고) 한유만·김원길씨 등이 기억에 납니다. 인천을 향해 오다 목포 앞에서 우리가 탄 배가 고장을 일으켜 표류했어요. 다행히 우리 해군 함정이 나타나 예인해서 대흑산도에 들어가 수리했습니다. 영흥도에 상륙해 보니 목포 경비 부에 있던 한봉규 병조 장이 중대장이 돼 탈환한 뒤의 경비를 맡고 있더군요. 한 병조 장은 해군 몇 명과 현지 청년 20여명을 데리고 있어요. 경비는 한 병조 장이 맡고 우리는 현지 청년 20여 명을 공작원으로 포섭, 첩보 활동을 했어요.
9월1일에 「클라크」 대위 일행이 들어왔는데 같이 온 연정씨는 자체 경비를 위해 현지서 청년들 20여명을 데려와 쓰더군요. 13일 저녁에 우리 대원 대부분은 이희정 사령관으로부터 작명을 받으러 가는 함 소령을 따라 덕적도로 갔어요. 14일에 영흥도로 다시 돌아오는데 앞 바다의 암초 위에 섬에 남아있던 이 병조 장이「팬츠」만 입고 떨고 있어요. 14일 새벽에 괴뢰군들이 대부 도에서 건너와 자기는 겨우 도망쳐 나왔다는 거예요. 함 소령은 이성호 학장에게 연락해서 703함으로 적을 맹포격케 하더군요.
15일 하오에 영흥도에 올라가 보니, 남아있던 우리 대원 중 임 소위 홍 중사와 공작원 1명이 전사했어요. 김상진 일등병조는 실종한지 3일만에 생환했구요.
14일 밤 괴뢰군이 들어왔을 때 학살된 20여 명의 애국 청년들은 우리 첩보 대「클라크」 첩보 반 한봉규 중대에 협조했던 사람들이었어요. 상륙 전이 끝나 인천에 올라가니까 우리 첩보요원으로 큰 활약을 한 김을 미군 헌병대에서 잡으러 왔어요. 괴뢰 내무서원으로 악질이었다고 누가 일러바친 모양이에요. 함명수 대장이 신원보증을 서서 무사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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