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인천 상륙>(6)「6·25」 20주…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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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영흥도 첩보 전>(1)
「맥아더」원수는 지형과 해상조건 때문에 「유엔」군이 인천에 절대 상륙하지 않는다고 적 측은 판단하고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런 신념은 첩보 활동의 확인으로 뒷받침돼야했다.
또 실제 상륙 전에 앞서 경인 지구의 적 배치 병력을 비롯하여 비어 수로의 기뢰 설치, 월미도와 인천 암벽의 방어시설과 만조 때의 암벽의 높이 등 세밀히 탐지해야 할 기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클라크」 대위가 원정>
이러한 인천 상륙 첩보 전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 우리 해군과 함께 영흥도에서 전개한 미 극동 사 정보부 직할의 「유진·프랭클린·클라크」첩보 반이었다. 8월26일 「클라크」 해군 대위는 미 극동 사 정보부 비밀회의 석상에 불려가 『인천 상륙이 결정됐는데 정보가 충분치 않아 현지에 잠입 탐지해야 한다. 이 탐지의 성과 여부가 상륙 전의 성패를 좌우하는데 이 임무 수행의 적임자로서는 귀관밖에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사실 미군은 태평양전쟁 후 4년 간 한국에 주둔하면서 그 동안, 인천을 주요 보급 항으로 사용했지만 항만에 관한 정보는 놀랄 만큼 갖추어 있지 않았다. 이런 중대 명령을 받은 「클라크」대위는 이때 심경을『솔직히 말해서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고 할 수 없지만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만은 사실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대위는 수병으로부터 대위까지 누진한 군인으로서 그의 경력으로 보아 인천항 잠입에 가장 적격자였다. 태평양전쟁 때에는「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필리핀」까지 싸우며 북상했고 전후에는 군용 화물선의 항해장·통신장·포술장·정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일본과 「오끼나와」의 군정에도 관계했다.
그는 치밀·냉정한 성격에다 수리적인 머리를 갖고 있어 문제점을 제기, 평가하여 해결안을 짜내는 종합적인 판단력을 갖고 있었다. 어학도 일본어와 중국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여하튼 이런 정보 수집에는 안성맞춤의 장교였다.
「윌터·카리그」 해군대령·「말콤·카글」 중령·「프랑크·맨슨」 소령의 공저 』미 해군의 전투 기록』(Battle Report, the War in Korea)이란 항목으로 이 첩보 반의 활동 내용이 소상히 기록돼 있는데 이 자료와 한국 해군의 관계 증인의 증언, 그리고 본사 기자의 현지 영흥도 답사기록 등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겠다. 먼저 『「클라크」원정』자료로부터 서두를 인용해보면,

<한국인 통역 2명 차출>
『미 극동 사 정보 부의 명령을 받은 「클라크」대위는 8월26일 하오에 우선 대구로 비행하여 미 8군으로부터 2명의 한국인 통역을 차출 받았다. (주=나중에 나오는 다른 자료 및 증인이야기와 상치됨)
둘을 데리고 그 날밤 일본 좌세보에 돌아온 「클라크」는 그를 전적으로 지원하게 돼있는 영국 해군 사령부에 출두했다. 그로부터 5일간 「클라크」는 행동 계획의 입안과 조정, 정보수집 계획의 수립, 휴대품의 조달 등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8월30일까지는 대체로 준비를 끝내고 휴대품으로 「C·레이션」 30상자·단 기관총·자동소총·「카빈」·탄약·수류탄·「위스키」·휴대무전기·의약품·현금 1백 만원 등을 마련했다.
그는 현지 주민들은 식량이 부족할 테니까 돈보다도 쌀이 더 귀중하다고 생각하고 30일 밤중에 쌀 90kg과 건어 30kg을 다시 마련했다.
「클라크」대위 일행은 8월31일 상오 7시에 영 순양함 「자메이카」호의 엄호를 받으며 영 구축함 「차리티」호로 좌세보를 떠나 원정의 길에 올랐다. 영국 함을 이용한 것은 당시 서해의 목적지가 영국 함대 담당의 작전 해역이기 때문이었다.

<말끔히 청소된 한국 포함>
두 함은 9월1일 상오 7시에 인천 남서 30리의 덕적도 앞에 도착하여 여기서 한국 해군의 703호로 갈아탔다. 「클라크」 대위는 한국 포함이 몹시 더러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영국 함 보다도 더 깨끗했다. 승 조원들은 제복도 잘못입고 있었지만 함 내는 윤이 나도록 청소가 잘돼있었다. 일행은 한국 함장이 확성기로 불러 모이게 한 3척의 조각배를 타고 영흥도에 상륙했다."
다음은 「클라크」 첩보 반을 영국 구축함으로부터 인수하여 영흥도까지 상륙시킨 한국 해군 703호 함장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이성호씨(당시 703호 함장=중령·예비역해군중장·현 신양해운 사장·46) 『8월 하순에 김성은 대령의 우리 해병대 통영 작전지원을 끝낸 다음 서해안 경비명령을 받고 덕적도로 올라갔습니다. 덕적도 근해에 닻을 내리고 있는데 해 본에서 미 해군 「클라크」대위를 호송해서 영흥도에 상륙시키고 계속 엄호해주라는 작명이 왔어요. 영국 구축함에서 미 육군소령 1명, 「클라크」 대위, 연정씨, 이모씨, 미군 통신병 한 사람으로 된 첩보 반을 인계 받아 영흥도에 상륙시켰습니다. 우리는 영흥도 앞에 닻을 내려 정박해 있고, 「클라크」 첩보 대는 며칠만큼 소형선을 타고 나와 보급품을 날라 갔어요. 이 첩보 대는 썰물 때는 팔미도까지 건너가더군요. 나도 그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고 그들로 일체 비밀로 하더군요.

<클라크, 703 함장 힐책>
하루는 영흥도의 「클라크」첩보반 본부에 가보니까 「미스·임」이라는 예쁜 여대생이 밥을 지어주며 헌신적으로 협조를 하더군요. 「미스·임」은 기독교 가정출신으로 신학교에 다니다가 섬으로 돌아왔다는데 영어도 곧잘 합디다. (주=「미스·임」은 나중에 학살됨) 「클라크」 첩보대원들은 팔미도·선재도·대부 도는 수시로 드나들었어요. 이때 영흥도에는 17여명의 우리 해군 정보대가 이미 들어가 있었어요.
9월8일 께 해 본서 연평도룰 점령하라는 명령이 왔어요. 연평도로 향해 가는데 한 민간인이 손짓을 하며 헤엄을 쳐와요. 배 위에 끌어올려 물어보니 이 사람은 전에 해군에 있었더군요.
이 사람으로부터 연평 도에는 괴뢰군은 없고 내무서원 1개 분대 밖에 없다는 정보를 얻었어요. 승 조원 중에서 20여명을 선발, 상륙 부대를 편성해서 고경영 대위(현 해군본부근무·소장) 인솔하에 쳐들어가 연평도롤 완전 탈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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