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웰」제검사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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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제7사단은 이제「조용한 아침의 나라」와 석별의 정을 나누게 되었다. 일본의 압제로 부터 해방을 맞게 했으며, 소위 인민군과 중공군과의 전쟁을 치르고, 그 황량한 화재위에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우리의 임무는 끝이 난 것이다」
25일자 성소지(미군교관지)는 주한 미7사단의 고별기사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이 사단의 전력을 보면 그야말로「피와 눈물과 땀」의 결정체가 바로 이 부대인 것 같다.
1917넌12월6일「조지아」주에서 창설, 숨돌릴 겨를도 없이 그 이듬해에 국외로 출진했다. 이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이며, 그속에서 고전을 치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엔 전화가 극치에 달한때에「얼류션」열도로 진주했다. 그들은 극동에 진출한 최첨단의 부대였다. 1943년4월의 일이다.
1948년 한국에선 최초의 자유선거가 치러졌고 정부가 수립되었다. 7사단은 이때까지 38선을 지켜주었다. 선거가 끝나자 그들은 일본으로 철수했다. 그러나6·25동난이 터졌다. 그해인 1950년9월11일 이들을 필두로 미군 7만의 병력은 일본「요꼬하마」를 떠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T·R·페런바크」저『이런 전쟁』이라는 동난 역사를 보면 당시 7사단 단장이던「알먼드」장군은 동난후 꼭 3개월이 되는 날에 서울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정말 9월25일, 서울의 남산엔 10군사단하의 7사단기가 꽂혔다. 그리고「알먼드」장군은 바로 25일자정에 서울 입성의 감격적인「메시지」를 전 세계에 발신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은 절반밖에 점령하지 못했었던 상황으로 보아「알먼드」장군의 수도탈환 집념이 얼마나 강했던지를 짐작 할 수 있다.
한국 동난사를 보면 7사단은 격전지를 앞장서서 섭렵하고 있다. 1951년「철의 삼각지」에서 피와 눈물의 전쟁을 계속할 때, 7사단장병들은 매일같이 구병전을 치렀다. 『대검의 사단』(Bayonet Div)이라는 별명은 이때 얻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감격을 남겨준 것은 혜산진 작전이다.「유엔」군으로서는 한국전에서 최북단까지 진군, 압록강물을 마신 최초의 부대였다.
『나는 당신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최대의 축하를 드립니다.』「맥아더」장군은 이때에「알먼드」장군에게 이런 친서를 보냈다.
압록강건너 불과2백70m 떨어진 패주의 눈덮인 항량한 벌판을 바라보았을 그들의 감회는어떠했을지-. 1956년 이 대통령은 이 부대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아리랑」을 사단가로 선사했었다. 『화검을 높이 들어라』라는 그 사단가는 이제 미국 대륙에서나 들을 수 있게되었다. 7사단의 철수는 미국의 해외역할의 변동을 상징하는 새로운 정치철학의 일맥인 것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7사단의 평화가 세계의 평화를 상징하는 날이 어서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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