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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아홉 개의 싸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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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이러저러한 외국계 회사 사장 자리도 여러 번 꿰찼던 이가 지금은 흙을 만지며 소나무 분재를 하고 나름 디자인 마인드를 담아 정원 만드는 일에 나섰다기에 지인들과 함께 찾아가 봤다. 손수 고기를 구워내며 밥상까지 차리더니 술 한잔 들이킨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가장 큰 싸움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언젠가는 내게도 그 시간이 어김없이 엄습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5년 전부터 누구한테도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 나이를 얘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좌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나이를 잊고 산다. 나는 오로지 오늘만 생각하고 산다.” 이 말을 들을 때 삶의 결기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으며, 적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 얼마 전 세상을 뜬 베트남의 독립영웅이자 20세기 최고의 명장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보 구엔 지압 장군의 말이다. 하지만 역으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싸우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며, 적이 생각지 못하는 방식으로 싸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은 물론이다. 병법의 달인 손자는 아홉 개의 싸움터, 즉 구지(九地)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제후가 자기 땅에서 싸우면 그곳을 산지(散地)라 한다. 적지에 들어갔으나 깊지 않은 곳을 경지(輕地)라 한다. 내가 얻어도 이롭고, 적이 얻어도 이로운 곳을 쟁지(爭地)라 한다. 나도 갈 수 있고 적도 올 수 있는 곳을 교지(交地)라 한다. 여러 나라에 접해 있어 먼저 도착하면 천하의 무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을 구지(衢地)라 한다. 적지에 깊이 들어가 배후에 성읍이 많은 곳을 중지(重地)라 한다. 산림이나 험한 길, 습지 등 통과하기 어려운 곳을 범지(氾地)라 한다. 들어가는 길은 좁고 돌아오는 길은 멀어서 적이 적은 병력으로 우리의 많은 병력을 칠 수 있는 곳을 위지(圍地)라 한다. 신속하게 싸우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곳을 사지(死地)라 한다.” (손자병법 ‘구지’편)

 # 손자는 이 아홉 개의 싸움터에서 각각의 조건과 형편에 맞춰 용병지법(用兵之法)으로 대응해야 하는 바, 마음이 느슨해지는 산지에서는 싸우지 말고, 깊지 않더라도 일단 적지인 경지에서는 멈추지 말며, 팽팽히 맞선 쟁지에서는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피아가 교차하는 교지에서는 병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복잡하게 얽힌 구지에서는 외교를 잘하며, 적국 깊숙이 들어간 중지에서는 별 수 없이 약탈하고, 행군이 곤란한 범지에서는 신속히 통과하며, 적에게 둘러싸인 위지에서는 살 계책을 세우고, 사지에서는 죽기살기로 싸워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손자의 가르침에 따라 맞닥뜨린 싸움터의 조건과 성격을 일일이 따져보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그것이 결코 녹록지 않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실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계책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오로지 물불 안 가리고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에만 익숙한지 모른다.

 # “남자는 전장(戰場)에서 빠르게 나이를 먹는다.” 나폴레옹이 한 말이다. 하지만 전장에는 나폴레옹이나 손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총칼을 들어야만 전장인가. 이미 사는 게 전장인데! 손자병법에 나오듯이 싸움터를 이리저리 분석하고 가릴 새도 없다. 한 번 전쟁을 치르면 또 다른 전쟁이 기다렸다는 듯이 덮쳐오기 일쑤인 것이 우리네 삶이요 일상 아닌가. 그러다 보니 하루도 쉴새 없이 전장 같은 일상을 사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빠르게 나이를 먹는다. 나 역시 머리가 하얗게 셌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늙어가는 게 슬픈 게 아니다. 그나마 이렇게 죽자 살자 싸우다가 어느 날 문득 삶의 마지막 관문 앞에 턱하니 놓여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자가 가을을 타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가 바로 이 대목에 있지 않을까 싶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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