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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법 의원입법은 사회적 대화 포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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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기찬
경제부문 선임기자

지난 7일 고용노동부는 새누리당과 당정 협의를 하며 의원들에게 14쪽짜리 자료를 제공했다. 이 자료에는 ‘대외주의’라는 문구가 겉표지 오른쪽 상단에 새겨져 있었다. 자료에는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고, 육아휴직을 초등학교 3학년까지 확대하며, 시간선택제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 등이 담겨 있다.

하나같이 기업과 근로자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만만찮은 것들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한국 고용시장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사안”이라고 했다. 정부가 자료 공개를 꺼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당정협의 내용이 알려지자 경영자단체와 중소기업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노동계도 이들 사안이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느라 분주하다.

 고용부는 이 자료에서 “고용률 70% 로드맵·국정과제 중심으로 시급성·중요성 등을 고려하여 8개 법안을 중점 추진법안으로 선정·입법 추진한다”고 적시했다. 문제는 이들 법안 가운데 민감한 사안은 모두 의원입법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근로시간 단축, 육아휴직 확대, 근로시간 단축 청구권 등이 그것이다. 정부가 법안을 만들어 입법절차를 밟는 것은 국가기술자격 시험을 강화하거나 노동위원회 운영을 개선하는 것들이다. 노사 간에 반발의 여지가 비교적 적은 사안이다.

 이채필 전 고용부 장관은 “이번에 의원입법으로 추진되는 것들은 정부의 ‘청부입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법을 만들 경우 당정협의(30~60일), 입법예고(40~60일), 규제심사(15~20일), 법제처 심사(20~30일), 차관회의 심의(7~10일), 국무회의 심의(5일), 대통령 결재(7~10일) 등 6개월 이상 걸린다. 이 기간 동안 이해 당사자인 노사는 물론 산업통상자원부와 같은 관계부처의 의견이 반영되고, 고용시장에 또 다른 규제가 되지는 않을지 그 파장까지 면밀히 들여다본다. 하지만 의원입법으로 추진하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속전속결로 입법을 마무리할 수 있다. 정책 추진과정에서 불거질 문제점을 걸러내는 과정이 사실상 생략되는 셈이다. 이 전 장관은 “고용시장을 경직시키거나 또 다른 규제가 될 우려가 있는 법안은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노사정위원회를 방문해 “노동시장을 개혁하는 데는 사회적 대화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도 쫓기듯 법부터 만들어 강제할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말처럼 “알을 깨는 고통”을 감수하며 사회적 대화의 파트너로서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김기찬 경제부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