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부진 책임" 대한전선 오너 경영권 자진 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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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대한전선의 오너 3세인 설윤석(32) 사장이 경영권을 포기하고 사장직에서 물러난다.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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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전선은 7일 보도자료를 통해 “설 사장이 채권단과 협의 과정에서 자신의 경영권이 회사 정상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 회사를 살리고 주주 이익과 종업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경영권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채권단의 결정에 따라 경영진이 교체된 사례는 있어도 오너가 경영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설 사장은 “선대부터 50여 년간 일궈 온 회사를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며 “내가 떠나더라도 임직원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 보여 준 역량과 능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해 줄 것”을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대한전선 관계자는 “오너인 설 사장은 물러나지만 회사는 현재 경영진들에 의해 그대로 운영된다”고 설명했다.

 대한전선은 1955년 설립됐다. 창업자인 고(故) 설경동 회장은 일제시대 함경북도 청진에서 청어잡이 선단을 이끌며 이름을 날린 대부호였다. 광복 후 친일파로 몰려 공산당에 재산을 몰수당하자 어선 몇 척을 몰고 남쪽으로 왔다. 적산(敵産)기업인 조선전선을 불하받아 대한전선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아들 고 설원량 회장대까지 성장을 거듭하며 2000년대 중반까지 국내 전선업계 1위를 지켰다. 창사 이후 50여 년간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2004년 설원량 회장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사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부인인 양귀애 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 먼저 나섰고, 장남인 설 사장 역시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이듬해 24세의 나이로 경영에 뛰어들었다. 설 사장의 합류에도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성숙기에 접어들어 침체에 빠진 전선사업을 만회하고자 전문경영인을 중심으로 레저·부동산개발·건설 등에 진출을 추진했다. 한때 대한전선은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의 ‘큰손’으로 불리기도 했다.

 과감한 투자는 급작스러운 글로벌 금융위기로 좌초했다. 투자 과정에서 늘어난 차입금에 대한 금융비용은 갑자기 늘어났고, 투자자산의 가치는 급락했다. 재무건전성이 악화일로를 걸으며 유동성이 부족해지자 2009년 5월엔 채권단과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맺었다. 설 사장은 29세이던 2010년 말에 재계 최연소로 부회장 직함을 달고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부동산 매각과 자회사 정리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지난해 2월엔 부회장에서 사장으로 직위를 낮춘 데 이어 같은 해 연말엔 사모펀드 투자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보유지분을 담보로 제공하며 최대주주 자리를 내놓았다.

  올 상반기 말 현재 연결기준 부채비율은 8329%이고 차입금 의존도는 71%에 달한다. 이에 따라 설 사장이 자칫 경영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채권단의 협조를 얻어내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 경영권을 포기하는 배수진을 친 것으로 보인다. 앞서 STX그룹의 경우 강덕수 회장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채권단과 그룹 측이 마찰을 빚으면서 구조조정이 지연되기도 했다. 대한전선 관계자는 “차입금이 현저히 줄고 대형 수주가 잇따르는 등 구조조정의 최종 단계에 와 있다”며 “설 사장의 경영권 포기 결단으로 회사는 채권단 주도로 구조조정을 마무리하고 조기에 정상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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