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호통장 되는 국감 … 정무위 증인 94% 재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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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4일부터 20일간 국정감사(國政監査)가 진행된다. 입법부가 행정부를 감시·견제하도록 하기 위해 법으로 보장한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그런데 올해 국감에선 특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각 상임위가 경쟁이나 하듯 민간인들을 대거 증인으로 채택하고 있는 점이다. 정무위의 경우 4일 현재 기관증인 277명과 함께 일반증인 63명, 참고인 46명에 대한 국정감사 출석요구안을 가결했다. 일반증인 63명 중 재계 인사는 59명(94%)에 달한다. 동양그룹 사태와 관련해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정진석 동양증권 사장 등을, 일감몰아주기와 관련해 신종균 삼성전자 대표·김경배 현대글로비스 사장이 포함됐다. 손영철 아모레퍼시픽 대표, 최주식 LG유플러스 부사장 등은 불공정거래 행위로 줄줄이 불려나올 판이다. 올해는 경제민주화와 ‘갑의 횡포 논란’ 등이 이슈가 되면서 여야 모두 기업과 민간부문에 대한 증인 채택에 열을 올리는 분위기다.

 상황은 다른 상임위도 마찬가지다. 국토위는 4대 강 사업과 관련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허창수 회장과 현대건설, 대우건설, 삼성물산, 대림산업, GS건설 등 기업 관계자들을 증인으로 확정했다. 허 회장은 대기업들의 대표라는 이유로 증인으로 채택됐다.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는 이석채 KT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환노위도 7일 전체회의에서 증인 채택을 시도하고, 산업위 역시 기업인과 경제단체 대표 89명을 무더기로 증인(혹은 참고인)으로 채택한 상태다.

 주요 6개 상임위에서 국감 증인으로 채택된 민간인들은 2011년 61명에서 지난해 145명으로 늘었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는 규모가 더 확대될 건 뻔하다. 이에 대해 민주당 정무위 간사인 김영주 의원은 “지난해 국감에서 재벌 2세들을 출석시켜 불공정 행위에 대한 시정을 다수 이끌어냈다”며 “국감의 취지에 맞게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입법도 중요하지만 법망을 피해가는 기업에 대해선 국감에서 문제를 지적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같은 정무위의 새누리당 간사인 박민식 의원은 “20명이 넘는 정무위원이 증인 3명만 신청해도 60명이 넘는다”며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인에 대한 출석 요구를 자제할 필요는 있지만 큰소리를 쳐야 하는 의원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민간인 증인을 확대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회의원들의 권한인 의정활동을 일일이 제약할 순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난해 정무위 국감 증인으로 출석한 26명의 민간인 중 절반에 가까운 12명은 질문조차 받지 않고 자리만 지키다 돌아갔다. 다른 상임위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우선 ‘증인채택부터 하고 보자’는 식으로 하다 보니 증인은 넘쳐나고 시간은 모자라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올해 채택된 민간인 증인 숫자로 볼 때 의원들이 잠 안 자고 꼬박 국감을 하지 않는 한 지난해와 같은 일이 재탕되지 않는다고 보기 어렵다.

 “국감 대상은 국가기관인데도 기업인들을 대규모로 증인으로 채택해 정책감사가 아닌 기업감사라는 오명을 받고 있다”(6일 한국경영자총협회 성명)는 업계의 반발을 지나쳐버리기 어려운 이유다. 과도한 민간인 증인 채택이 때론 기업의 피해로 직결되기도 한다. 실제로 2011년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청문회와 국정감사에 참석한 뒤 해외 선사들은 구두계약했던 선박 수주 계약을 취소한 일도 있었다. 선박을 새로 수주한 건 2년 가까이 지난 2013년 4월이었다. 한국외대 정치학과 이정희 교수는 “국회의원들이 유권자에게 단순히 ‘재벌총수를 불러 호통쳤다’는 모습을 홍보하기 위해 민간인 증인을 채택하는 것은 정치의 후진성이 반영된 것”이라며 “앞으로는 증인 채택 자체보다 국감을 통해 이끌어낸 실질적 성과를 중심으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가 민간인을 상대로 스스로 ‘갑(甲)의 횡포’를 부리는 건 아닌가 되새겨봐야 할 일이다.

강태화·박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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