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야 일어설 수 있고 그 뒤에야 걸을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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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세진(오른쪽)군과 어머니 양정숙씨가 4일 오후 수원 성균관대 교정을 나란히 걷고 있다.

“한부모가정, 입양, 장애…. 사람들은 우리를 ‘종합선물세트’라 부르지만 우리만큼 재밌게 사는 사람들 아마 없을 걸요?”

 ‘로봇다리’ 김세진(16)군과 어머니 양정숙(44)씨 얘기다. 세진군은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와 오른손 손가락 3개가 없었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보육원에 맡겨졌다가 양씨에게 입양됐다. 어머니 양씨는 세진군에게 로봇다리를 달아줬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2009년 영국 런던 세계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서 3관왕을 달성하며 장애인수영계 유망주가 됐다. 올해 성균관대(체육과학과) 역사상 최연소로 입학했다.

 지난달 22일 미국 뉴욕 허드슨강에서 열린 일반인 수영대회에 참가했던 세진군은 전체 21위, 18세 이하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어머니 양씨를 세진군와 함께 지난 4일 수원 성균관대에서 만났다. 양씨는 “세진이를 키우며 나도 함께 자랐다. 세진이를 사랑하기에 강하게 키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세진군을 키우는 특별한 원칙이 있다면.

 “원칙이라기보단 세진이에게 늘 새로운 도전 과제를 주며 키웠다. 단, 내가 못할 것 같으면 아이에게도 안 시켰다. 5세 때는 자전거 타기, 8세 땐 ‘테리 폭스 마라톤’에 도전해보라 했다.(테리 폭스는 암으로 한 쪽 다리를 잃었지만 암 치료 연구기금을 모으기 위해 143일 동안 캐나다 대륙의 3분의2인 5373㎞를 횡단했다. 암이 재발해 사망했다. 테리 폭스 마라톤은 그를 기리기 위한 마라톤 대회) 나도 그때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 채 세진이와 함께 달렸다. 9세 땐 계룡산 정상 정복에 이어 로키산맥 등정에 도전했다. 그렇게 키우다보니 나도 세진이도 함께 성장하는 게 느껴졌다.”

 -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게 한다는 원칙을 세운 이유는.

 “선친의 영향인 것 같다. 선친께서 내가 클 때 이런저런 걸 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마다 내가 정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시키지 않으실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 덕에 힘든 상황에 처해도 버틸 수 있었다. 나도 내가 하기 어려운 일이면 어린 세진이도 하기 힘든 일일 거라 생각해서 무리한 주문은 하지 않았다.”

 - 선친께선 어떤 일을 시키셨나.

 “아버지가 상당한 재력가셔서 나도 아주 유복하게 컸다. 바닷가에 갈 때도 유모가 날 업고 구두에 모래가 묻지 않도록 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일주일 중 하루는 반드시 남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밥 먹을 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어기면 정말 밥을 굶어야 됐다. 5세 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 꼭 양로원 같은 데를 갔다. 안마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밥 먹기 위해서…. 그 습관이 평생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원동력이 됐다.”

 - 부잣집 딸이니 재산을 많이 물려받았겠다.

 “전혀. 한 푼도 물려받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가난하다. 내 20세 생일에 보따리를 싸서 집 앞에 내놓으셨다. 성인이 됐으니 독립하란 거였다. 너무 막막해서 아버지께 차용증을 쓰고 50만원을 빌렸다. 그 돈으로 함바집과 대학 등을 돌며 커피를 팔아 먹고 살았다. 집을 구할 때까진 아버지께 월세를 내고 살았다. 돌아가실 때 장례비를 빼고는 전부 사회에 환원하셨는데 아쉽다 생각해본 적 없다.”

 - 세진군 입양 후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입양 문제와 다른 것들이 겹쳐 이혼했다. 내가 낳은 딸과 세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소형차 마티즈를 몰고 고속도로를 탄 채 북쪽으로 달렸다. 대전쯤 왔을 때 기름이 다 떨어져 대전으로 갔다. 전 재산이 150원이었다. 그 돈으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백화점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일자리를 달라 사정했고, 두부판매원 자리를 얻어 그날부터 일했다. 대리운전 등 온갖 일을 다 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 세진이를 이용한다는 오해도 받는다고 하던데.

 “‘병신아들 팔아 앵벌이해 먹고 산다’ ‘숨겨놓은 재산이 있다’ 등 온갖 소리 다 들어봤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나만 떳떳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이들 행복만 신경쓴다.”

 - 아이가 20세 되면 당신처럼 독립시킬 건가.

 “물론이다. 딸은 그렇게 독립해서 지금 반도체 회사에 다니고 있다. 세진이도 20세가 되면 내보낼 거다. 아이를 위해서다. 뭘 하든 세진이 선택 존중할 거다.”

 양씨는 세진군에게 “넘어져봐야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선 뒤에야 걸을 수 있다”고 늘 각인시켰다고 했다. 세진군도 그런 어머니 양씨의 신조를 물려받았다. “세상에 기대지 말자. 세상을 기대하지도 말자. 세상이 날 기대하게 만들자”는 게 그의 좌우명이다. 세진군의 현재 목표는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장애인 계급장을 떼고 수영선수로 정식 출전하는 거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겠다는 건 더 먼 미래의 목표. 어머니 양씨가 인터뷰 말미에 입을 열었다.

 “세진아, 늘 당당해져라.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져라. 저는 제 아들의 자존심이 될 겁니다. 제 아들이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될 때까지요.”

수원=글·사진 한영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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