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학의 스승…사보|중화 학술원 「두보 오십운」을 보내며|이가원 <문박·연세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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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해 1천2백 주기를 맞은 시성 두보에 관해 동양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가졌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자유중국의 중화 학술원은 두보의 탄일을 음력 1월1일로 정하고 학술 강연 및 기념 문집 간행을 위해 외국의 저명한 시인·학자들에게 두보에 관한 글을 청탁했는데 우리 나라 이가원 박사에게도 시를 의뢰해 왔다. 오는 10일 (음 15일)열릴 기념식에 맞추어 이 박사는 「두보 오십운」을 써 보냈다. <편집자>
올해 1971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은 우리 동방의 시성 두보 선생 (712∼770) 의 1259회 연 신이다.
중화민국 중화 학술원 시학 연구소의 동인들이 선생의 시풍을 추모하여 보름 상원절을 맞이하여 기념 행사를 크게 거행하는 한편 해외의 시인에게 한시를 청탁하여 장차 기념 시집을 내려한다.
나도 역시 시학 연구소의 한 위원으로서 청탁을 받은 인사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위원이 된 동기는 지난 1967년에 출판된 한시문집인 「연연야사재문화」가 중화 학술원의 심사를 거쳐 철사의 학위를 얻게 되었고 그해 가을에 국제 화학 대회가 대만서 열리자 해원의 초청으로 「공학재 한국」이란 논제로 발표한바 있었고 이어 연구소에서 「한국한시가지학사」를 사강하게 되었으니 전강이란 단 한사람만의 강연을 이름이다.
그 전편이 해소에서 발간한 「중화 시학」 제1권·제4기의 첫 머리에 실렸었고 그 당일 석상에서 「증리가원박사」라는 시제로서 나에게 음증한 이는 장유한, 양한조, 진남사, 오만곡, 역군좌, 역대덕, 장혜강, 정치반, 서단보, 노원준 여러 사백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절구 14편, 사율 4편인데, 역시 모두「중화시학」에 실리었다.
내가 때 마침 모상 중이었으므로 운문을 읊지 못하고 다만 「화강시회서」 한편을 지어 답례하였다.
나의 강연한 내용이 대체로 우리 나라의 한시는 두보를 배웠고, 또 몇 천년의 주조임을 밝혔다.
이제 해소의 청탁을 받고 며칠을 생각한 나머지 특히 두집 중의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1편 50운을 차운하여, 오언 장편으로 된 서서와 서정이 교착된 1편을 읊어 멀리 보내었다.
그 내용은 두보의 사실적인 시풍이 동방 천년의 주조임을 밝히고 우리 나라에 수많은 학두가가 탄생되었으나 고려 때 익재 이제현이 가장 대가였음을 논급하였다.
이는 내가 일찌기 익재를 한국의 두보로 추숭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두보를 추숭하는 것은 비단 하나의 개인적인 의견에서 나온 주장이기도 하지만 역시 가정에서의 이어받은 전통적인 개념이었음을 밝혔다.
퇴계의 시는 주로 도잠과 두보의 영향을 많이 입었고, 세칭 삼당파의 거성인 손곡 이달이 퇴계의 제자였으며 광해군 때의 여류 시인 난설 허초희와 그의 아우 교산 허균이 모두 손곡에게 시를 배웠고, 그 뒤 석북 신광수의 「등악양누탄관산융마」는 평양 홍누계에 2백년 동안 가장 이름 높았으며, 선군 석전옹의 1950년 동란 중에 읊은 「등령남누탄남북병진」은 석북의 것을 차운하여 영남루를 악양루에 비한 것이다. 이는 이미 석북의 후손 신석초의 국역으로 『현대 문학』에 실리었기 때문이다q
춘원 이광수도 일찌기 평양에서 신석북의 글을 보고 감탄하여 본 이름인 보경을 광수로 고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또 수많은 두시 중에서 하필이면 이 「영회」5백자 시를 차운 하였을까. 이는 내가 평소에 이 편을 애송하였고 이편 중에서도 다음의
주문주육취
노유속사골
두 글귀를 가장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두 글귀는 실로 그의 작품으로 가장 이름 높은「북정」이나「삼이」·「삼별」중에서도 보기 어려운 글귀인 까닭이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저 붉은 문 속엔 술과 고기 썩어 냄새나건만 이 한길 가엔 얼어서 쓰러진 뼈가 보인다
두 선생의 그 애국 연민적인 사상이 이 두 글귀에 소담히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즈버 그 개원·천보 시대의 호화 찬란하던 땅덩이가 하루 아침 검은 재로 변하였다. 그 당시 부정부패로 충만 된 사회의 현상을 친히 목격한 나머지 특히 그 빈 계층의 고통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동정심은 금치 못하였다.
더러는 우리 나라 시인은 두보 보다도 이백을 더 추숭한다 하나 나는 결코 그렇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이조 초기 중국의 시를 국역하였을 때 「시경」의 다음에는 재시를 가장 먼저 하였음을 보아서도 짐작이잘 것이다.
또 한국의 사회가 전란과 빈한에 헤어나지 못해서 이러한 문학 사조가 부풀어오르기 가장 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서슴지 않고 받아들인 민족도 드물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나는 익재가 한국의 두보라면 석북은 한국의 백거역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 이른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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