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동남아 활보 구경만 … 속타는 오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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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 연방 공무원이라고 밝힌 한 남성이 2일(현지시간) 워싱턴 의사당 앞에서 연방정부 일부 폐쇄(셧다운)에 항의하는 뜻에서 1달러짜리 지폐를 마스크처럼 입에 두르고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 로이터=뉴스1]

동남아 순방에 나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이 배달됐다. 다름 아닌 미국 정부의 셧다운 소식이었다. 시 주석이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와 함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국빈방문 길에 오른 2일(현지시간) 미국 정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말레이시아·필리핀 방문을 전격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7일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두 정상이 동남아를 무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펼칠 것이란 예상이 뜻하지 않은 이유로 시 주석의 ‘노마크 찬스’로 바뀐 것이다. 동남아는 남중국해 통항 및 남사군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미·중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지역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시 주석의 표정은 밝고 발걸음은 가벼워 보인다. 시 주석은 3일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연설을 하며 남중국해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 등 밀접한 양국 관계를 과시했다. 두 나라는 한때 비동맹 외교를 함께 주도한 특수관계였다. 시 주석은 앞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100억 위안(약 1조7600억원)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에 합의했다. 루피화 환율 안정을 위해 중국이 선물을 제공한 셈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발만 구르며 이를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다. 아시아로의 회귀나 이 지역에서의 ‘재균형’(리밸런싱)을 강조해 온 전략이 무색해졌다. AP통신 등 외신들은 “미국의 외교가 반 토막이 났다”며 “그나마 오바마가 APEC 회의와 EAS(동아시아 정상회의)가 열리는 인도네시아와 브루나이를 방문하는 것은 손상된 체면을 유지하려는 고육책”이라고 평가했다.

 당장 오바마의 방문이 취소된 필리핀은 대미 협력을 통한 정책 추진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을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현지 언론들은 “오바마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확대하려는 아키노의 구상에 제동이 걸렸다”고 분석했다.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필리핀 정부는 미국과의 군사협력 강화와 함께 군 현대화 사업을 추진해 왔다. 또 양국이 남중국해 인근의 팔라완 섬에 미군 함정을 위한 군항을 건설하려던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유럽에서도 셧다운 후폭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미국의 셧다운이 지속된다면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와 독일 정부는 “미국의 예산안 처리가 지연되면서 프랑스 경기회복도 지연될 수 있다” “미국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예산안 합의가 실패로 끝나 유감”이라는 성명을 냈다.

 한편 셧다운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연방정부 폐쇄 이틀째를 맞아 2일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의회 지도자들이 1시간 넘게 만났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고 전했다. 해리 리드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 인사들에게 (당신들의) 협상안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소개하며 협상 타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워싱턴 정가에서는 셧다운 사태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며, 이달 중순까지 처리해야 할 국가부채 상한 재조정 협상과 함께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부 공화당 의원은 당의 강경노선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피터 킹 하원의원은 “티파티(극우보수파)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당을 좌지우지하려 한다”며 “100명 정도의 공화당 의원은 이미 셧다운에 지쳐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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