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김찬삼 여행기「파나마」서 제5신-정열의 고원엔 숱한 정복자발자국|여성들엔 강렬한 원색의 관능미|곳곳에 정복기념비|교통의 요충....마치 인종전시장|스페 인·미국풍이 공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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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면서 겪은 이 나라의 독특한 열대성 천둥과 벼락은 귀청이 찢어질만큼 요란한 지옥의 음악과도 같았다. 이렇듯 무서운 자연의 횡행속에서 원시적인 만큼 내리 퍼붓는 「스콜」을 한참동안 맞았더니 얼빠진 사람모양으로 정신이 얼떨떨했다.
여객선엔 으레 피뢰침이 있을테니 벼락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나 혹 벼락의 세례를 받지 않을가 하고 적이 두렵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천둥과 벼락이 하도 극적이어서 이담에 내가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앞에서 형벌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현세에서 심판을 받는 것이 보람있지 않느냐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제재가 없음이 아쉽다고나 할까.
그런데 「파나미」에 정변과 반란이 많은 것은 이번 기상조건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나라의 국민정신은 「가톨릭」교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종교의 드높은 박애주의사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본시 정열적인 국민성을 지닌데다가 늘 이런 천둥이며 벼락을 맞는 탓으로 은연중에 뇌신의 성격을 닮아서 과격파의 심성들을 지닌다면 나의 「파라독스」 일까.
갑판위엔 안개가 자옥이 끼여있다. 이 운하를 넘기 전에 본 이국정서가 넘치는 아름다운 정경들을 비롯한 자연이며 유적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 나라는 교육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서 서구여성과도 같이 세련된 여성은 많은 것 같지 않으나 그 검은 눈동자에는 딴 민족에서 보기드문 정열적인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그리고 1차 여행 때 들렀던 이 나라의 이웃나라인 「코스타리카」처럼 미인이 많지는 않으나 이 나라여성의 정열미는 저 「베토벤」의 「정열소나타」에 못지 않은 여성미의 으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나라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인종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땅의 옛주인인 본토박이 「인디오」, 「스폐인」과 「인디오」또는 흑인과의 혼혈종, 그리고 그전「파나마」운하를 만들때 동원되어 왔던 「자메이카」흑인의 후손들이 한때 어울려 살고 있는데다가 세계 여러나라 사람이 드나들기 때문에 이 자그마한 나라는 깡그리 인종의 전람회장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서울 「파나마시티」는 태평양에서 「파나마」운하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데 이 도시는 16세기에 이룩되었으나 그 뒤 「헨리· 모건」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었었다. 여기다 새도시를 다시 세울때엔 빈번한 해적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높은 성벽을 쌓았던 것이다. 이 도시가 지금의 서울 「파나마시티」의 모습이다.
「파나마시티」는 세계적인 요지가 될 만한 곳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여러나라 정복자들에게 짓밟힌 숙명적인 땅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많은 정복자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많이 서 있다. 서울은 「스페인」식과 미국식이 공존하는 도시같기도 하고 어딘가 동양적인 모습도 엿보인다.
여기서 동쪽으로 약 80km만 떨어지면 아직도 백인이 밟지 않은 삼림이 펼쳐지고 또 서남쪽으로 가면 「페노노메」란 가장 오랜 도시가 있는데 이것은 처음「스페인」사람이 여기오기 전인 까마득한 옛날에 원주민이 살던 곳이다. 이 부근에서는 선사시대의 문명이 꽃을 피웠다고 하며 4천여년 전의 출토품이 발굴되고 있다.
이 곳은 역사적으로 나중에 어떻게 평가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민족과 정치를 단위로 하는 「랑케」의 역사관과는 달리 문명을 단위로 하는 「토인비」의 역사관으로 본다면 세계사에 있어서의 문화사적인 큰뜻을 지니지 않을까 한다. 세계사는 사상이나 권력의 투쟁보다는 문화의 투쟁으로써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면 이 「파나마」의 「패노노메」도 고대문화도시로서의 각광을 받아야 할 것만 같다.
이 옛도시는 「이탈리아」의 「폼페이」처럼 그 옛날 화산의 폭발로 묻혔다고 하는데, 지금은 질펀한 초원지대로서 가축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어디선가 「레스피기」의 옛 「로마」의 흥망성쇠에 대한 강렬한 환상과 회상을 불러일으키는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와도 같은 음악이 흘러올 것만 같다.
역사가 「토인비」의 말처럼 인류의 창조물의 최고형태가 문화이며 여러문화가 같은 비중을 지닌다면 이「페노노메」의 고대문화도 비록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나 「마야」 문명 못지 않은 비중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한다. 이 문화는 전재가 아니라 천재로 말미암아 묻혀버린 것이 애석한 일이지만 앞으로 전쟁으로 엮어지는 「악의역사」가 아니라 문화로서의 「선한역사」를 이룩하는데 이바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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