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낙동강 공방전(8)|동부전선(5) 「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적, 포항에 제2차 공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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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괴군 제5사단은 적의 9월 공세에 앞질러 8월28일에 포항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원래 이 5사단은 8월 공세 때 영덕·강구에서 국군 제3사단에 중압을 가하여 장사동에서 해상 철수케한 후 포항북부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태백산중을 강행 잠진 중인 적12사단과 766유격연대는 8월11일에 처음으로 포항에 진입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고 18일께에 비학산으로 후퇴한 후 이 방면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교적 전력이 충실한 제5사단이 포항을 다시 공격함으로써 9월23일에 적이 패퇴할 때까지 25일간에 걸친 처절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전회에서도 지적했듯이 동부전선은 적의 8월 공세 보다 9월 공세 때에 더 아슬아슬한 위기를 여러번 겪었다. 이것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는 있지만 전체 낙동강교두보 공방전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28일에 공격을 개시한 적5사단은 29일에는 국군 제3사단의 좌익을 포위했다. 미 해·공군은 포항전투를 우선적으로 지원하기로 하고 순양함1척과 구축함 3척은 적5사단의 보급지점으로 생각되는 흥해에 12·5「인치」포탄 1천5백발을 쏘아 그곳을 불바다로 만들었지만 적 공세는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다음은 적의 9월 공세를 맞아 포항에서 싸운 참전 자들의 이야기.

<3사단병력 겨우 천여명>
▲이종찬씨(당시 제3사단장=대령·전 육군참모총장·현「코리언·엔지니어링」사장·56) 『9월1일에 부산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구두로 3사단장에 취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2일에 김신 소령(전 주중대사)이 조종하는 경비행기로 대구를 거쳐 연일비행장에 내렸지요.
비행장은 미군이 경비하고 있는데 마중 나온 김재규 소령(현○○사령관) 「지프」로 포항시내로 들어가 사단사령부가 있는 산업은행지점으로 갔읍니다. 김석원 사단장은 위경련에다 고열이 겹쳐 중환이고 참모장 공국진 중령도 병이 나서 요양 가고 없어요. 말하자면 사단사령부의 기능이 마비상태예요. 적의 제2차 공세 제1격으로 사단이 많이 다쳐서 병력도 전부1천명 정도밖에는 안돼요. 그 자리에서 사단장직을 인수하고 그날 밤 옷 입은 채 자는데 적 박격포탄이 사령부주변에 막 떨어집데다.
그때 사단편제는 22(연대장 김응조 중령) 23(연대장 김종순 중령) 26(연대장 이치업 대령)의 3개 연대고 참모장직무대리가 정내혁중령이었지요. 정 중령은 나와 함께 일하면서 나중에는 정식으로 사단 참모장이 됐구요. 내가 부임했을 때 26연대는 수도사단에 임시로 배속되어 안강 방면에서 싸우다가 얼마 후에 돌아왔죠. 26연대가 다른 부대에 가있는 동안 고근홍 중령이 이끄는 8사단 10연대가 우리 사단에 와있었구요. 23연대에는 학도의용군도 끼여있었는데 남상선 소위가 중대장으로 지휘했고 학생측은 유병욱 군이 대표였읍니다.
지형을 보니 적은 포항시내 북쪽고지와 산을 장악하고 있어 방어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만약 포항이 뚫린다해도 막기 위해서는 형산강을 장애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형산강은 하류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어디서든지 건널 수 있어서 큰 전략적 가치는 없어요, 그러나 여기밖에 방어선을 칠데가 없어 장비가 우수한 연일비행장의 미군부대지원을 받아 버텨보고 마지막으로는 구룡반도로 들어가 싸울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읍니다.

<26연대 8사단복귀에 말썽>
구룡포에는 마침 LST가 한척있어 만약 여기서 철수한다해도 큰일은 없겠더군요.
아침에 산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북쪽을 살펴보았더니 흥해 벌판에는 주민들이 웅성거리고 적이 까맣게 집결해있어요. 남쪽고지에는 아군이 포진해있고….
9월4일에 「데이비슨」준장이 지휘하는 미군 전투지원단이 왔어요. 이 부대는 90㎜포를 장비한 「탱크」가 주력인데 우리 한국군의 전투가 서투르니 흥해 방면에서 한번 시범전투를 하겠다는 겁니다. 나도 지휘 겸 관전하러 고지로 올라갔읍니다.
처음에는 「탱크」를 앞세우고 호기롭게 나가더군요. 적도 역시 「탱크」 앞장서 나와 피아 간에 「탱크」전이 벌어졌는데 쌍방이 모두 한대씩 불탑데다. 이렇게 하루를 싸우더니 이튿날엔 이제 다 끝났다고 철수해버려요.
이틈을 타서 그만 적들이 쫙 밀려 들어와서 포항시내까지 점령했어요. 오히려 미군부대가 안 왔던 것만도 못한 결과가 되고만 셈이지요. 9월7일께에는 안강 쪽에 있던 수도사단이 밀려서 경주까지 후퇴했어요. 이 통에 우리사단도 좌측에 구멍이 뚫려 형산강하류로 밀리고 말았읍니다. 이때 수도사단에 가있던 26연대가 안강서 패하고 잔존병력을 이끌고 우리사단으로 돌아왔어요. 얼마 후 영천전투가 벌어지자 1군단서 우리사단에 와 있던 10연대를 8사단으로 원대복귀 시키라는 지시가 왔어요. 이 연대교대 때에 말썽이 생겼지요. 나는 고근홍 연대장에게 26연대가 돌아와서 부대배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고 중령은 내 명령을 어기고 마음대로 병력을 빼가버렸어요. 이 통에 적이 쭉 침투해와서 고전하게 됐어요. 나는 고 중령을 처벌하려고 했지만 타 사단이고 해서 참았읍니다.

<인천상륙 며칠 후 적세약화>
9월15일에 나도 전연 모르는 사이 우리사단 바로 전면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의 일부로 장사동 상륙작전이 전개됐어요.(본 연재 123회 참조)
육본서 국회의원 최윤동씨와 개성서 12연대장을 하던 전성호 대령을 시켜 유격대를 조직했어요. 노획한 소제장총으로 밀양서 민간인을 훈련시켜 안동호라는 LST 한척에 싣고 상륙시켰다는 겁니다. 국군으로서는 최초의 상륙작전이었지만 완전히 실패했어요. 바로 옆에 있는 우리 사단에 전혀 알리지도 않고 이런 상륙을 했다는 것은 작전의「미스」지요. 나중에 장사동에 가보니 시체는 없고 배만 해변가에 뒤집혀 있더군요.
9월15일에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는데도 포항에서의 적 압력은 조금도 약화되지 않아요.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정말 상륙했나하고 의심까지 나데요. 그러나 19일이 되니까 적세는 급속히 약화되어 이날 포항을 완전히 탈환하고 일로 북진했지요.』
▲이치업씨(당시 3사단26연대장=대령·현 도로공사감사·50) 『형산강일대의 전투는 정말 가열했읍니다. 연대장이나 대대장의 지휘위치가 같았고, 밤이 되면 적이 작은 배로 접근해서 맹사격을 가하고는 사라져요. 시가전 때 낮에 북단의 고지를 점령하면 15분 후면 적 포격으로 쑥대밭이 돼요. 어디서 그렇게 많은 포탄보급을 받는지 적 포화가 아주 치열했어요. 이 때문에 아군의 사상자가 많이 났지요. 「미주리」함포의 위력은 대단합디다.
한번 포문을 열면 포성과 진동이 커서 아군도 행동을 못하고 꼭 엎드려 있어야해요. 이때 사단CP가 도구동에 있었는데 그 후면은 바다예요. 후퇴하면 바다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곳이지요. 그래서 이종찬사단장에 이 점을 물어보았더니 「이상 더 후퇴하게 되면 자결할 이니 염려 말라」고 해요. 사단장이 이런 각오이니 모두 여기서 싸워서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병력이 모자라 부산서 모병한 학도의용군을 밤에 2백명 내지 3백명씩 받아 각 소대에 배치해놓고 아침에 가보면 벌써 많이 전사했어요. 포항전투에서는 정말 꽃다운 젊은 학생들이 많이 죽었읍니다.』

<흰손 수건 흔들던 암호 누설>
▲신승호씨(당시 3사단23연대1대대1중대3소대선임하사=현 제8390부대주임상사·43) 『하두 오래돼서 거의 다 잊었지만, 여하튼 영덕·강구·포항에서 대단히 고전했던 것만은 기억이 나요.
특히 이 무렵에 우리 3사단과 미군비행기와 서로 통하는 암호요령이 누설되어 적이 이것을 역이용하는 바람에 혼이 났어요. 그때 우리는 미군 기가 오면 총대에 흰 손수건을 달아 흔들게 미리 짰는데 이 암호가 새어나가 적도 총대에 흰 수건을 달고 흔들었어요. 미군 기가 왔을 때 모두 흰 수건을 흔드니까 조종사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마구 기총 소사를 퍼부었어요.
이 통에 우리부대의 공격계획이 좌절됐는데 어떻게 해서 그 암호가 새어나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 지역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실신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울산 제26육군병원이데요.』
이번에는 다시 이 지구전투에서 국군과 함께 싸운 경찰관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서장살해 투항"음모 적발>
▲박규철씨(당시 울진서장·현 민생무진 춘천지점장·55) 『나는 그때 2백여 명의 서원을 데리고 남하하면서 적과 싸웠는데 영덕·강구에서 겪은 20여 일의 고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경찰은 연령도 20세부터 50세까지여서 문제가 많았지요. 보안주임 김용길 경위가 50세였지만 이분은 참 잘 싸웠읍니다.
강구에서 우리가 적에게 포위됐을 때 과거에 좌익포섭공작으로 기용했던 김모경사가 동료를 은밀히 선동하여 서장을 살해하고 적에 투항하자는 음모를 꾸몄읍니다. 그자의 동작이 수상하여 내사한 결과 거사직전에 발각, 체포하여 총살한 일도 있지요.
포항에 후퇴해서는 우리 경찰은 낮에는 시 뒷산에서 싸웠고 밤이 되어 적이 침투하면 건물옥상에 집결하여 대전했구요. 날이 새어 적이 산너머로 후퇴하면 또 쫓아가 싸우다가 밤에는 다시 시내옥상으로 후퇴하는 이런 전투가 20여 일이나 계속됐읍니다.』
▲현택승씨(당시 포항경찰서 신광지서순경·현 신민당동대문구당부·45)『포항 각 경찰서원이 여기저기서 약 2백여 명이 한데 모여 의포리 뒷산 경비를 맡게 된 것이 8월15일께입니다. 그전에는 모두가 각개로 싸웠구요.
그때의 지휘자인 포항경찰서장 신상묵 총경이 우리 경찰이 한번 공격해보겠다고 하니까, 3사단에서 나와있던 어떤 소령이 펄쩍 뛰면서 군1개 사단도 고전인데 2백 경찰이 뭘 하겠느냐고 말립데다. 8월25일께 나는 형산강에 인접한 송하지서에 배치됐다가 9월2일에 국군과 함께 포항탈환전에 참가, 모래동에서 적과 싸웠어요.
이때 안장도 없는, 적마 몇 마리가 시내를 왔다갔다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9월5일의 모래동 전투에서 윤병호 순경이 부상했는데 6일에는 국군도 다시 형산강까지 밀려서 경찰은 송하까지 후퇴했지요.
이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경찰이 포항서에 완전히 복귀한 것은 9월22일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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